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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李起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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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순(聖循)
호(號)지헌(志軒)
생년1897(광무 1)
졸년1971
시대항일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호국 > 우국지사
이정의(李正儀)
연안이씨(延安李氏)
조부이계우(李啓宇)
증조부이회로(李會魯)
경주김씨(慶州金氏)
처부김상문(金相文)
외조부이시균(李時均)
출생지경상북도 의흥현(義興縣) 율리(栗里)
묘소대동리(大東里) 개곡(開谷)
저서『지헌문집(志軒文集)』

[상세내용]

이기철(李起轍)
1897년(광무 1)∼1971년. 일제강점기‧근현대 우국지사(憂國之士). 자는 성순(聖循)이고, 호는 지헌(志軒)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경상북도 의흥현(義興縣) 율리(栗里)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오늘날의 군위군(軍威郡) 부계면(缶溪面) 대율동(大栗洞)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이회로(李會魯), 조부는 우매당(寓梅堂) 이계우(李啓宇)이고, 부친 이정의(李正儀)와 모친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이시균(李時均)이다. 부인은 김상문(金相文)의 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태어났을 때 이마가 훤하고 목소리까지 우렁차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동유에 비해 조금 늦게 시작하였으나, 8세에 십구사(十九史)를 당숙(堂叔) 계정(溪亭) 이돈의(李敦儀)에게서 배웠는데, 매우 영특하였다. 병화(兵火)를 당해 피신을 할 때 그는 오직 족보(族譜)와 『효경(孝經)』 등 몇몇 책만을 가지고 갔을 뿐이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당해 조정과 민간에서 많은 인사들이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의 장로(長老)가 비분강개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 어린 나이로 방패와 창을 잡았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낭산(朗山) 이후(李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구(金榘)김종민(金鐘珉) 등과 교유하였다. 1919년 스승 곽종석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3일 동안 문후하고 돌아왔다.

1929년 맏형이 모친을 모시고 만주(滿洲)로 이주하려고 하자 힘써 말렸으며, 만주에서 1930년 2월 모친상을 당했을 때 모친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함에 괴로워하였다. 1932년 1월 모시든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동문(洞門)을 나가지 않고 고기와 생선은 입 근처에도 대지 않았다.

그 후 장석영‧곽종석 등 스승과의 친분관계로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하여지자, 이들을 피해 1935년 영천 화산 유성으로 1945년 영천 금호 대미로 옮겨 살았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1945년 조국이 광복을 하자 매우 기뻐하였으나, 곧 남북이 분열되고 6.25 동족상잔에 크게 슬퍼하였다. 또한 만주에 있는 형을 모시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자 형을 그리워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슬하에 3남 이강홍(李康洪)이강용(李康鏞)이강화(李康鏵)성승표(成承杓)에게 출가시킨 딸을 하나 두었다.

묘소는 최초 대동리(大東里) 개곡(開谷)에 자리하였으나, 군위군 부계면 가호리 선산(先山)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그의 유고 『지헌문집(志軒文集)』에는 이호대(李好大)의 서문과 이기형(李起亨)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후(李垕)『낭산문집(朗山文集)』에는 이후와 그의 우국충정이 담긴 편지글들이 실려 있다. 그는 전희룡(全熹龍)의 시문집인 『포암문집(匏庵文集)』의 편집간행에도 참여하였으며, 유원식(柳元軾)『호은유고(湖隱遺稿)』에 발문을 작성하는 등 학문적 발자취를 남겼다.

[참고문헌]

朗山文集
志軒文集
匏庵文集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