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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하(金容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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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달우(達宇)
호(號)우당(愚堂)
생년1896(건양 1)
졸년1950
시대항일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교육 > 교육가
전인항(全仁恒)
출생지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하귀리(下貴里)

[상세내용]

김용하(金容河)
1896년(건양 1) 12월∼1950년. 일제강점기 교육자‧서예가‧정치가. 자는 달우(達宇)이고, 호는 우당(愚堂)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하귀리(下貴里)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전인항(全仁恒)이다.

19세에 평양제2고보(平壤第2高普)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부터는 일본 치하의 제주도에서 서기로 2년여 간 재임하였다. 그러다 일본인들의 학정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면서 관리 생활을 청산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제주도내 의식이 깨어있는 청년들로 이루어진 탐라협회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동경(東京) 법정대학(法政大學) 예과(豫科)를 거쳐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철학과의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후 함경북도 종성(鍾城)중학교의 교사 직을 시작으로 대구 사범학교 교장을 지내게 되었는데, 대구 사범학교는 전대통령 박정희의 출신 학교 이기도 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문교부 장학관에 발탁되었는데, 이때 남녀공학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주장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또 경성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와 용산공립중학교 교장, 조선 민족청년단 서울시단 이사,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과장과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및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를 지냈다.

그는 또 1949년 4월 20일 제4대 제주도지사로 부임하여 민생‧치안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도지사부임 7개월 만인 1949년 11월14일 그는 사범학교 교장을 지낼 때의 공금횡령 혐의와 지사 전용차를 서울에 가지고 간 일 등으로 퇴임당하였다. 퇴임 후 그는 명예회복을 위해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조직과 자금력이 부족하여 낙선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곧이어 6.25사변이 터졌다. 당시 북한군들은 애국지사들 3000여 명을 납북해 갔었는데, 이때 그도 북한군에 의해 납북 당했다.

서예에도 뛰어났던 그는 붓글씨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해방 후 ‘한글습자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습자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교육용 붓글씨 책이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애월읍지(涯月邑誌)에는 그의 마지막 서예 작품이 실려 있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김관중(金貫中)이고, 셋째 아들은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金宇中)이다.제주도 제주시 한라산(漢拏山) 사봉산책로 20에는 김우중을 비롯한 자녀들이 1985년 부친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하고 제주시에 기증한 우당 도서관이 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인사록
제주실록
20세기제주인명사전
제주도지
涯月邑誌(金禧洙, 1997)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