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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헌(羅昌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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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6(건양 1)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북도 희천(熙川)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나창헌(羅昌憲)
1896년∼미상.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희천(熙川) 출신.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대표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예심을 받던 중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다.

그뒤 5월 6일에 동지인 안재홍(安在鴻)연병호(延秉昊)송세호(宋世浩)이병철(李秉徹) 등과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여 중심인물로서 국외의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한독립애국부인회(大韓獨立愛國婦人會)에도 참여하였다.

동시에 대동단(大同團)의 비밀단원이 되어 왕손 이강(李堈)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데려가려다가 발각되어 안재홍 등과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뒤 1922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외곽지원단체로 김구(金九) 등이 설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기반을 공고히 다져나가는 데 기여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립에 참여하고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같은해 11월에 교육부원(敎育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24년 6월에는 임노공부원(任勞工部員)으로 노병(勞兵)을 초모하고 훈련시키는 데 앞장선 바 있다.

1924년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 취임하여 한국노병회를 이끌어가면서 상해일대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에게 민족의식과 임시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같은해 9월에는 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김구 등 임시정부요인을 도와 민주공화제 정착과 그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임시정부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한 심판위원장이 되어, 그해 3월 13일 드디어 이승만대통령탄핵안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제의하여 결국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과 경무국장‧내무부차장 등과 병인의용대장을 역임하였다. 상해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두 동생과 같이 곧이어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항저우(杭州)로 피신하였다가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한편 상해에서 의정원의원 또는 경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조계에서 세웅원(世雄院) 병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東國血史(大韓文化情報社, 1956)
抗日殉國義烈士傳(吳在植, 愛國精神宣揚會, 1958)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韓民族光復鬪爭硏究(李炫熙, 正音文化社, 1988)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