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량(張斗良)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A5B450B7C9B1895X0 |
생년 | 1895(고종 32) |
졸년 | 1954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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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함경북도 부령 |
공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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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장두량(張斗良)
1895년(고종 32)∼1954년.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부령 출생.
1919년 3‧1운동 당시 청진부(淸津府) 신암동(新巖洞)‧포항동(浦項洞)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부령군 청암면(靑巖面) 자작동(自作洞)에 거주하고 있던 그는 월산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열람하고, 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서, 방낙선(方洛先) 등과 거사를 모의하였다.
청암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져와 독립선언서 1,000 여매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또 무명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여, 3월 31일 신암동에서, 4월 1일에는 포항동에서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 활동하였다. 화룡현(和龍縣) 사백사(四白社) 및 합화사(合化社) 지방을 근거로 한 대한국민회의 남지방회(南地方會)에 소속되어, 경호대원 겸 모연대원(募捐隊員)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3월 이래 함경도의 회령(會寧)‧부령‧무산(茂山) 등지에 들어와 장정 및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2,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해서는 칠도구(七道溝) 등지에 대한국민회지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이동백(李東伯) 등 동지 7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10년 4개월간 복역하였다.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청진부(淸津府) 신암동(新巖洞)‧포항동(浦項洞)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부령군 청암면(靑巖面) 자작동(自作洞)에 거주하고 있던 그는 월산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열람하고, 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서, 방낙선(方洛先) 등과 거사를 모의하였다.
청암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져와 독립선언서 1,000 여매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또 무명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여, 3월 31일 신암동에서, 4월 1일에는 포항동에서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 활동하였다. 화룡현(和龍縣) 사백사(四白社) 및 합화사(合化社) 지방을 근거로 한 대한국민회의 남지방회(南地方會)에 소속되어, 경호대원 겸 모연대원(募捐隊員)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3월 이래 함경도의 회령(會寧)‧부령‧무산(茂山) 등지에 들어와 장정 및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2,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해서는 칠도구(七道溝) 등지에 대한국민회지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이동백(李東伯) 등 동지 7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10년 4개월간 복역하였다.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 2(국사편찬위원회, 1968)
朝鮮獨立運動 제Ⅰ권分冊(金正明, 원서房, 1968)
朝鮮獨立運動 제Ⅰ권分冊(金正明, 원서房, 1968)
[집필자]
한시준(韓詩俊)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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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