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엽(白永燁)
[상세내용]
백영엽(白永燁)
1892년(고종 29) 4월 23일∼1973년 10월 12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이다.
1918년 일본수상 가쓰라타로[桂太郞] 주살 모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1년간 거주제한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여 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재학 중에는 중국 학생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같은 해 9월 군자금 모금을 하기 위하여 입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임시 정부 대표들에게 여비를 조달하였다.
1920년 6월 임시 정부 법무차장 안병찬(安秉瓚)이 중국 관헌들에게 체포되자 석방 협의에 참석하였다.
1921년 3월 3일 상해에 기거하며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에 가담하였으며, 국내외에 포진되어 있던 각 교회에 조선의 독립에 대한 호소문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1922년 8월 14일 평안남도에 위치한 안주(安州)교회 목사를 맡게 되어 입국하던 중 열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7년 5월 선천지회(宣川支會) 간사로 활동하며 민족계몽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하여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석방이 되었지만 석방이 될 때까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렀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에,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918년 일본수상 가쓰라타로[桂太郞] 주살 모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1년간 거주제한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여 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재학 중에는 중국 학생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같은 해 9월 군자금 모금을 하기 위하여 입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임시 정부 대표들에게 여비를 조달하였다.
1920년 6월 임시 정부 법무차장 안병찬(安秉瓚)이 중국 관헌들에게 체포되자 석방 협의에 참석하였다.
1921년 3월 3일 상해에 기거하며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에 가담하였으며, 국내외에 포진되어 있던 각 교회에 조선의 독립에 대한 호소문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1922년 8월 14일 평안남도에 위치한 안주(安州)교회 목사를 맡게 되어 입국하던 중 열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7년 5월 선천지회(宣川支會) 간사로 활동하며 민족계몽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하여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석방이 되었지만 석방이 될 때까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렀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에,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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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