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흥도(金興道)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D765B3C4B1891X0
생년1891(고종 28)
졸년1922
시대항일기
활동분야군인 > 광복군
출생지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여흥면(餘興面) 가산리(嘉山里)

[상세내용]

김흥도(金興道)
1891년(고종 28)∼1922년.(주1)
생몰년
그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한국인명대사전』에는 1895년으로 되어 있고, 동아일보 1922년 2월 4일자 기사에는 1922년에 32세로 나와 있다. 동아일보 기사를 따라 생년을 1891년으로 한다.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여흥면(餘興面) 가산리(嘉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후에 김시황(金時晄)김동식(金東植) 등과 의주군(義州郡) 동암산(東巖山)에서 조직한 보합단(普合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보합단에는 의주군, 용천군(龍川郡), 선천군(宣川郡), 철산군에 거주하던 20, 30대 청년들이 입단하여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아 상해(上海)의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이 모집한 군자금의 규모는 83건, 5,700원(圓)에 달하였다.

김흥도가 보합단을 창단했는지, 나중에 입단했는지는 불확실하나, 1920년에는 의주동암산에 있다가 그 해 8월에 보합단이 선천군 내산사(內山寺)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은 후에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이후 보합단이 옮겨간 만주(滿洲)관전현(寬甸縣) 등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9월에 국내로 들어와 의주군 비현면(枇峴面) 정산동(亭山洞)의 친일파 밀정 문치무(文致武)를 총살하고, 그의 첩을 난자하여 살해한 후, 집을 불태운 것 때문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 공소하였다가 기각을 당하고 경성고등법원(京城高等法院)에 상고하였다가 보합단원 김형석(金亨碩)김내찬(金迺贊)심창숙(沈昌淑)과 함께 1922년 2월 2일 32세로 평양에서 사형을 당했다.


[참고문헌]

일제침략하 36년사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34(獨立軍資金募集 3)
동아일보(1922년 2월 4일자 기사)
단재 신채호 기념관(http://www.danjae.or.kr)

[집필자]

고윤희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