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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송(李基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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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기동(李起同)
생년1888(고종 25)
졸년1939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전라북도 임실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이기송(李基松)
1888년(고종 25)∼1939년. 독립운동가. 일명 기동(起同). 전라북도 임실 출신.

1919년 3월 23일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미 오수리에서는 3월 10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모에게 엄중히 당부하여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 등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하여 호소하고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주재소에서 파견한 순사에 의하여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격분한 80여명의 만세시위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황한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석방하였다.

만세시위군중은 다시 2,00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시장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졌다. 만세시위의 대열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때 시위군중이 주재소에 쇄도하자 일본순사들은 달아나버리고 순사보 고택기(高宅基)만이 총을 겨누고 위협하였는데, 그들은 총을 빼앗고 만세운동대열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여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 남원 헌병분대와 임시경찰서에서 무장한 병력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대열과 대치하다가 무자비한 발포로 일단 해산되었으나, 시위군중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부터 단행된 일제의 검속에 의하여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3(國家報勳處, 1987)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