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호(姜相鎬)
[상세내용]
강상호(姜相鎬)
1887년(고종 24) 6월 3일∼1957년 12월 29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晉州)이며, 독립운동 당시 주소도 경상남도 진주이다.
1919년 3월 10일 무렵 강달영(姜達永)‧권채근(權采根)‧김재화(金在華)‧이강우(李康雨)‧박용근(朴龍根)‧박진환(朴進煥) 등과 함께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세웠다.
3월 18일 진주 장날 11시에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맞춰 봉기하기로 약속을 정하고, 정준교(鄭準敎)와 함께 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진주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고, 형평사 임시의장‧형평사 위원장 등을 지냈다. 또 진주노동공제회(晉州勞動共濟會)의 회계업무를 담당하였고, 일본인 시미즈[淸水] 사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14개 진주 시민단체의 실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진주지회(晉州支會) 간사(幹事)로도 활동하였으며, 사립학교인 일신고등보통학교(一新高等普通學校) 설립 발기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200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919년 3월 10일 무렵 강달영(姜達永)‧권채근(權采根)‧김재화(金在華)‧이강우(李康雨)‧박용근(朴龍根)‧박진환(朴進煥) 등과 함께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세웠다.
3월 18일 진주 장날 11시에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맞춰 봉기하기로 약속을 정하고, 정준교(鄭準敎)와 함께 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진주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고, 형평사 임시의장‧형평사 위원장 등을 지냈다. 또 진주노동공제회(晉州勞動共濟會)의 회계업무를 담당하였고, 일본인 시미즈[淸水] 사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14개 진주 시민단체의 실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진주지회(晉州支會) 간사(幹事)로도 활동하였으며, 사립학교인 일신고등보통학교(一新高等普通學校) 설립 발기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200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1923.2.24) 외
每日申報(1919.4.23) 외
朝鮮日報(1923.5.19) 외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發掘 韓國現代史人物(한겨레신문사, 1992)
釜山‧慶南 3‧1運動史(3‧1同志會, 1979)
晉陽郡史(晉陽郡史編纂委員會, 1991)
每日申報(1919.4.23) 외
朝鮮日報(1923.5.19) 외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發掘 韓國現代史人物(한겨레신문사, 1992)
釜山‧慶南 3‧1運動史(3‧1同志會, 1979)
晉陽郡史(晉陽郡史編纂委員會, 1991)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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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