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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석(明道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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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허당(虛堂)
생년1885(고종 22)
졸년1954
시대항일기
활동분야독립운동가/교육자

[상세내용]

명도석(明道奭)
1885년(고종 22) 4월 3일~1954년 6월 9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허당(虛堂)이다. 본적‧출신지는 경상남도 마산(馬山)이다.

본래 어시장에서 잔뼈가 굵어 건어물상으로 대성하였다. 당시 선창에서는 생선물에 김한영, 건어물에 명도석(明道奭)으로 불리며 대표적 거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후에는 뜻한바가 있어 경영이 잘 되는 양조업을 접고 운송업으로 바꾸었다. 차량을 통해 만주 등지에서 독립투사에게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원동회사’를 설립하여 백산 안희제를 통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독립운동‧상권수호운동‧교육운동 등을 하였다. 1907년(융희 1) 7월 10일 옥기환‧구성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야학을 설립하였다. 옥기환이 교장에, 명도석은 부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추산공원에서 벌인 마산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자금을 지원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0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박용만(朴容萬)의 밀사 백모씨와 만나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 미결수 감방에서 6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마산노동야학교(馬山勞動夜學敎) 교사가 되어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을 가르쳤고 1927년 7월20일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면서 마산지부(馬山支會)에서 간사(幹事)‧지회장(支會長)‧집행위원(執行委員) 등을 지냈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에 적극 참여해 몽양 여운형과 동지애를 과시했다. 경상남도 조직책을 맡다가 해방이 되고서는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창간의 대주주이기도 해서 일생을 예비검속 인물로 지목되어 왔으나,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할 만큼 반일감정이 충만한 민족주의자였다. 마산시 중성동에 생가터가 있으며, 마산시 봉암동에 ‘허당 명도석 지사 기념비’가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2005. 8. 24)
경남도민일보(2005. 3. 4)

[집필자]

이지은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