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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량(金鴻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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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85(고종 22)
졸년1950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사회운동가
출신지황해도 안악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홍량(金鴻亮)
1885년(고종 22)∼1950년. 일본 강점기의 애국계몽운동가‧교육자. 황해도 안악 출신.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통분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고, 1906년 김용제(金庸濟) 등과 함께 안악읍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양산학교와 병행하여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있으면서, 황해도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지도하였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가장 유력한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농촌개혁을 위해 사리원에 모범농촌을 건설할 계획을 수립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1910년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할 때, 김도희(金道熙)의 연락을 받고 김구(金九)안윤재(安允在)이승길(李承吉)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과 서간도 단체이주민 모집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2월, 8,500원을 기증하여 정달하(鄭達河)와 함께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농장과 무역회사를 공동 경영하면서 독립군기지 설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뒤 황해도의 애국계몽운동가 160여명이 검거된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인하여, 1911년 1월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1915년 10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1915년 10월 가석방 이후 행적이 드러났다. 황해도 안악의 재력가였던 그는 독립자금 모금에도 참여하였지만, 일본군 군용 차량 구입비나 황해도 신천 경찰서 건축비, 전투기 헌납금도 여러 번 냈고, 황해도 도회 부의장,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의 간부도 지냈다. 이런 이유로 일제에게 포상도 여러번 받았다. 이러한 경력이 드러나 서훈 취소가 논의되는 등 논란을 빚고 있다.

[참고문헌]

白凡逸志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7-20일제하 행적 논란 사실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