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田明雲)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04BA85C6B4B1884X0 |
생년 | 1884(고종 21) |
졸년 | 1947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출신지 | 서울 |
묘소 | 위티어(Whittier)천주교묘지 |
공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상세내용]
전명운(田明雲)
1884년(고종 21)∼1947년.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1905년 하와이로 이민, 1년간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철로공사장이나 알래스카어장 등에서 막노동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남달리 충의심과 애국심이 강하여 미주에서 결성된 항일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일본의 한국지배에 의분을 품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때 을사오조약 강제체결을 도와준 통감부 외교고문이며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일본의 한국지배 당위성을 주장하고 미국의 배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미국에 왔다. 스티븐스는 미국에 도착하자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친일발언을 하였다.
이에 격분, 국적(國賊) 스티븐스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권총과 스티븐스의 사진 한장을 준비, 페리역에서 대기하였다가 하차하는 스티븐스를 휴대한 권총으로 쏘았으나, 불행히도 불발로 끝났다.
이에 권총자루로 스티븐스의 안면을 강타하고 격투중 별도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하여 기다렸던 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유탄에 어깨부분을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그는 장인환의 공범자로 체포되었다.
그뒤 당당한 애국심에 불타는 호소에 감복한 재판관이 전명운을 무죄로 선고, 1908년 6월 27일 석방되었다.
전명운은 동지 장인환의 재판중 신변의 위험을 느껴 이름을 마크 필즈(Mark Fields)로 고치고, 변호사의 권유로 1908년 12월 시베리아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이곳에는 1907년 안중근(安重根)의사가 망명, 장차 이토(伊藤博文)를 죽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명운의 저격사건은 안중근의 거사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이다.
1909년 7월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전명운은 결혼, 1남 2녀를 두었으나, 1929년 상처하고부터 생계가 막연해서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는데, 외아들은 횡사하고, 딸 둘(경숙‧경용)이 미국에 살고 있다.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비참한 생활고 끝에 1947년 11월 18일 사망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위티어(Whittier)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05년 하와이로 이민, 1년간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철로공사장이나 알래스카어장 등에서 막노동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남달리 충의심과 애국심이 강하여 미주에서 결성된 항일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일본의 한국지배에 의분을 품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때 을사오조약 강제체결을 도와준 통감부 외교고문이며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일본의 한국지배 당위성을 주장하고 미국의 배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미국에 왔다. 스티븐스는 미국에 도착하자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친일발언을 하였다.
이에 격분, 국적(國賊) 스티븐스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권총과 스티븐스의 사진 한장을 준비, 페리역에서 대기하였다가 하차하는 스티븐스를 휴대한 권총으로 쏘았으나, 불행히도 불발로 끝났다.
이에 권총자루로 스티븐스의 안면을 강타하고 격투중 별도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하여 기다렸던 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유탄에 어깨부분을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그는 장인환의 공범자로 체포되었다.
그뒤 당당한 애국심에 불타는 호소에 감복한 재판관이 전명운을 무죄로 선고, 1908년 6월 27일 석방되었다.
전명운은 동지 장인환의 재판중 신변의 위험을 느껴 이름을 마크 필즈(Mark Fields)로 고치고, 변호사의 권유로 1908년 12월 시베리아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이곳에는 1907년 안중근(安重根)의사가 망명, 장차 이토(伊藤博文)를 죽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명운의 저격사건은 안중근의 거사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이다.
1909년 7월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전명운은 결혼, 1남 2녀를 두었으나, 1929년 상처하고부터 생계가 막연해서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는데, 외아들은 횡사하고, 딸 둘(경숙‧경용)이 미국에 살고 있다.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비참한 생활고 끝에 1947년 11월 18일 사망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위티어(Whittier)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季年史
共立新報(1908. 3. 25, 1908. 4. 1)
大韓每日申報(1908. 4)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룡, 1959)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San Quentin Docu-ment of I
W
Chang(California State Archives, 1909∼1919)
San Francisco Chronicle(1908. 3. 21‧24‧25.)
大韓季年史
共立新報(1908. 3. 25, 1908. 4. 1)
大韓每日申報(1908. 4)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룡, 1959)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San Quentin Docu-ment of I
W
Chang(California State Archives, 1909∼1919)
San Francisco Chronicle(1908. 3. 21‧24‧25.)
[이미지]
[집필자]
김원모(金源模)
대표명 | 전명운(田明雲) |
성명 | 전명운(田明雲) |
성명 : "전명운(田明雲)"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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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