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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직상(張稷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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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장원직상(張元稷相)
생년1883(고종 20)
졸년1959
시대항일기
활동분야관료

[상세내용]

장직상(張稷相)
1883년(고종 20) 3월 26일∼1959년 4월 10일. 일제 강점기 관료. 창씨한 이름은 장원직상(張元稷相)이다. 본적은 경상북도 구미(龜尾) 인의동(仁義洞)이다.

1903년(광무 7) 경기전(慶基殿) 참봉과 1904년(광무 8) 산릉도감(山陵都監) 감조관(監造官)을 지내다가 승진하여 1910년(융희 4) 경상북도 신녕(新寧)군수가 되었다. 이후 1911년 경상북도 비안군(比安郡), 1912년 하양군(河陽郡), 1913년 선산군(善山郡)에서 군수로 재직하였다. 이후 실업계에 투신하여 1917년부터 대구 선남은행이사‧왜관금융참고주식회사 사장‧경일은행주식회사 이사‧영흥탄광주식회사 발기인과 감사‧조양무진주식회사 대주주‧광영산업회사 발기인‧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대구상공은행주식회사 감사‧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이사‧남선양조주식회사 이사‧경북화물자동차주식회사 이사‧매일신보사 발기인과 감사‧남선수력전기주식회사 이사‧남선흥업주식회사 감사‧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발기인과 이사 등을 지냈다. 이와 함께 1922년 경상북도 도평의회원, 1924년 대구상업회의소 회장‧대구부(大邱府)공직자대회 회장‧조선공업협회 상담역과 평의원 등 지역과 재계의 유력자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1930년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에 선임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 1938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발기인과 평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평의원과 사무국 경제부 경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1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발기인‧이사로 참여한 뒤, 1945년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 1935년 시정 25주년 기념표창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관보(1903.5.23) 외
조선총독부관보(1911.6.22) 외
일본내각 관보(1913.5.24) 외
매일신보(1917.7.27) 외
경성일보(1925.11.28) 외
중외일보(1927.6.10)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21) 외
조선공업협회회보 제1호(1930.11) 외
조선총독북시정25주년기념표창자(1935)
총동원 창간호(1939.6) 외
국민총력 제2권 제11호(1940.11) 외
경학원잡지 제45호(1940.12)
경고비 제2372호 사상에 관한 정보(13)(1941.8)
언로조선총독부(정진석, 2005) 등

[집필자]

도승현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