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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주(姜達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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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80(고종 17)
졸년1960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호국 > 의병

[상세내용]

강달주(姜達周)
1880년(고종 17) 10월 21일∼1960년 10월 5일. 일제 강점기 의병장‧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본적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이다.

1907년(융희 1)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진행되었다. 이때 심남일(沈南一)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호군장(護軍將)을 맡아 강무경(姜武景)‧공진숙(孔盡淑)‧김도숙(金道淑)‧김성재(金聖載)‧나성화(羅聖化)‧노병우(盧炳友)‧박사화(朴士化)‧안찬재(安贊在)‧유치선(柳致先)‧이세창(李世昌)‧임만선(任萬善)‧장인보(張仁甫)‧정관오(鄭官午)‧최우평(崔友平) 등과 함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3월 7일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에서 벌어진 오치동(吾治洞)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6월 25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서 벌어진 능주면(綾州面)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렸으며, 10월 9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성내(城內)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칙명에 따라 의진이 해산되자 심남일 등과 함께 보성군(寶城郡) 일대에 피신하였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융희 4) 4월 4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죄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이 내려졌고, 상소를 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투옥 중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출옥 후에는 비밀리에 독립만세운동을 도왔으며, 이후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시종면(始終面) 봉소리(鳳巢里)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