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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준(高羲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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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고도기(高島基)
생년1880(고종 17)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관료

[관련정보]

[상세내용]

고희준(高羲駿)
1880년(고종 17) 11월∼미상. 일제 강점기 관료. 개명한 이름은 고도기(高島基)이다.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종로구(鍾路區) 황금정(黃金町)이다.

1895년(고종 32) 일본 도쿄로 유학을 다녀온 뒤, 1898년(광무 2) 전후에 독립협회 총대위원(摠代委員)을 지냈다. 1900년(광무 4) 경성학당 부교사로 재직하였다.

1904년(광무 8) 궁내부 예식원 주사가 된 것을 시작으로, 예식원예식관‧탁지부세무관을 지냈으며, 경상남도 거제군수 및 진남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09년(융희 3)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수행원으로 활동한 공로로 대한제국정부로부터 훈5등 태극장을,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9년 일진회 총무국 교섭위원이 되었으며, 국시유세단 발기인 및 전무간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추도하기 위한 대한국민추도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11년 충청남도 신창군수를 시작으로 조선총독부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1913년 연기군수로 임명되어 약 5년간 활동하는 동안 일본 정부로부터 대정대례기념장(大正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6년 황해도 신계군수로 재임용되었다. 이후 봉산군수‧곡산군수를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협성구락부를 개편하여 조직한 국민협회(國民協會)에서 상담역 및 정무조사위원장을 지내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에 관한 연설과 글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1924년 각파유지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6월부터 1929년까지 동민회 평의원을 지냈다. 1925년 보천교의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 발기인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일본 정부로부터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을 받았고, 1930년에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2년 군수를 사임한 후에는 소화연맹경성지부 부지부장을 지냈고, 1934년 조선대아시아협회 상담역을 지냈으며, 1939년에는 국민협회 상의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京本高秘 제1993호(1924)
개벽 제56호(1925.2)
관보(1906.1.22) 외
朝鮮人關係雜件 建言及陳情關係(1939) 외
조선신사록(1931)
조선총독부관보(1918.10.26) 외
대한매일신보(1909.7.30) 외
대한민보(1909.11.11)
제국신문(1900.10.23) 외
황성신문(1898.10.5) 등

[집필자]

김은지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