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영(朴斗榮)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BC15B450C601B1880X0 |
| 이명(異名) | 박중수(朴重樹) |
| 이명(異名) | 목하두영(木下斗榮) |
| 생년 | 1880(고종 17) |
| 졸년 | 1960 |
| 시대 | 조선후기 |
| 활동분야 | 군인 > 군인 |


[상세내용]
박두영(朴斗榮)
1880년(고종 17) 11월 28일∼1960년 2월 10일. 일제 강점기 군인. 본명은 박중수(朴重樹)이고, 창씨한 이름은 목하두영(木下斗榮)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북면(北面)이다.
1898년(광무 2) 관비 유학을 떠나 일본 세이죠[成城]학교를 다녔다. 1902년(광무 6)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03년(광무 7) 11월 졸업하였다. 1904년(광무 8) 2월 일본 근위야전포병연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 중에 러일전쟁에 종군하였다. 1904년(광무 8) 육군 참위로서 육군무관학교 교관과 군기창 검사관을 지냈다. 1905년(광무 9) 포병대 교감을 거쳐 육군 포병 정위로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맡았다. 1906년(광무 10) 대구진위대 소속 토벌대장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진압에 나섰다. 1906년(광무 10) 7월 육군 포병 참령으로 진급하고, 1907년(융희 1) 군부 군무국 포공병과장과 병기과장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을 받았다. 1910년(융희 4) 8월 주차헌병대사령부에 배속되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20년 훈5등 서보장, 1930년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1년 4월 일본군 포병 대좌로 예편하였다. 1932년 독립운동 분열에 큰 영향을 끼친 민생단(民生團) 단장, 1934년 간도협조회 본부 고문을 맡았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1939년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감사와 배영동지화 상담역, 1941년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 관비 유학을 떠나 일본 세이죠[成城]학교를 다녔다. 1902년(광무 6)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03년(광무 7) 11월 졸업하였다. 1904년(광무 8) 2월 일본 근위야전포병연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 중에 러일전쟁에 종군하였다. 1904년(광무 8) 육군 참위로서 육군무관학교 교관과 군기창 검사관을 지냈다. 1905년(광무 9) 포병대 교감을 거쳐 육군 포병 정위로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맡았다. 1906년(광무 10) 대구진위대 소속 토벌대장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진압에 나섰다. 1906년(광무 10) 7월 육군 포병 참령으로 진급하고, 1907년(융희 1) 군부 군무국 포공병과장과 병기과장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을 받았다. 1910년(융희 4) 8월 주차헌병대사령부에 배속되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20년 훈5등 서보장, 1930년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1년 4월 일본군 포병 대좌로 예편하였다. 1932년 독립운동 분열에 큰 영향을 끼친 민생단(民生團) 단장, 1934년 간도협조회 본부 고문을 맡았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1939년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감사와 배영동지화 상담역, 1941년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구한국)관보(1904.3.15 외)
조선총독부관보(1913.5.10 외)
간도협조회관계서류2
국민총력운동요람
간도신보(1932.2.17)
동아일보(1939.2.9 외)
(구한국)관보(1904.3.15 외)
조선총독부관보(1913.5.10 외)
간도협조회관계서류2
국민총력운동요람
간도신보(1932.2.17)
동아일보(1939.2.9 외)
[집필자]
장신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