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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룡(韓相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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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80(고종 17)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친일
한관수(韓觀洙)
출생지서울

[상세내용]

한상룡(韓相龍)
1880년(고종 17)∼미상. 친일 경제인. 본관은 청주(淸州). 서울 출생. 규장각제학 한관수(韓觀洙)의 아들이다.

17세 때 관립 영어학교(英語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89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립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병으로 귀국하였다.

1901년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02년 이 학교를 사직하고 평식원(平式院) 총무과장(정3품)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그 직을 사임하고 한성은행(漢城銀行) 우총무 취체역 총무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성수형조합(漢城手形組合)을 창립하여 평의원이 되었다.

1907년 경성상업회의소(京城商業會議所)의 정의원(正議員)‧회두(會頭)가 되었고, 1909년 한국은행설립위원이 되어 은행설립 준비차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금융계에 종사하여 한성은행의 전무‧지배인으로 있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사‧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경제단체의 임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또한 경성부협의회‧일본적십자사‧경기도평의원‧애국부인회 등 각종 정치‧사회 단체의 임원으로 친일적인 행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에 중추원참의가 되었으며 각종 친일적인 행사를 주도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평의원으로 친일행위를 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친일적 성향으로 일본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이래 수많은 훈장과 포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韓相龍を語る(韓翼敬, 韓相龍氏還曆記念會, 1941)

[집필자]

신재홍(申載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