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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규(金漢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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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자한규(金子漢奎)
생년1877(고종 14)
졸년1950
시대조선후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관료

[상세내용]

김한규(金漢奎)
1877년(고종 14) 9월 20일∼1950년 10월 5일. 일제 강점기 관료. 창씨한 이름은 김자한규(金子漢奎)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중구(中區) 수하동(水下洞)이다.

부친은 농상공부 참서관을 지낸 김희석(金禧錫)이다.

어려서는 한문을 수학하였고, 1895년(고종 32)에는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99년(광무 3)에는 외국어학교 부교관, 1903년(광무 7)에는 중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5년(광무 9)에는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이자 대주주가 되었다. 이어 1906년(광무 10)에는 관립한성일어학교의 교관 겸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1년부터 활발한 경제활동을 펼쳤는데, 조선상업은행감사를 지내면서 조선 금융계의 중심인물로서 한상룡(韓相龍)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1915년부터 1929년까지 한일은행전무, 1919년부터는 조선식산은행상담역을 맡아 1937년까지 그 직을 계속하였다. 1921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감사, 1923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는 조선신탁주식회사에서 이사와 감사를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성융흥주식회사‧조선미술품제작소주식회사‧경성가축주식회사‧조선인쇄서적주식회사 등 여러 회사에 대주주 혹은 이사로서 참여하였다. 또한 경성상업회의소, 조선경제회, 조선산림회 감사, 조선실업구락부 등 일제 정책에 협력하는 다양한 경제단체에서 부회장‧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조선농회의 감사로 활동하였다.

정치‧사회적으로 1911년에는 경산남도합천군수, 1915년부터 1920년까지 경성부협의회원, 1920년부터 1926년까지는 경기도평의회 민선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부터 1921년까지 대정친목회 설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평의원까지 지냈으며, 1922년에는 조선구락부 발기인, 1924년부터 1933년까지는 동민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는 조선방송협회의 이사로서 라디오 강연을 통하여 일제의 식민정책을 선전하는 활동을 수행하였다. 1935년에는 소도회의 상무이사로 활동하였고, 만주 조선인 교육자금으로 10만 원을 기부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940년에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박물관건설자금 1천 원을 기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았으며, 1941년에는 국방헌금으로 3천 원을 헌납하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의 부호로서 유흥에는 관심이 없고 사회 활동을 즐기는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청년이라는 평이 나와 있다.

[참고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매일신보(1916.12.1)(1919.12.8) 등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21∼1933)
동민(1924.6)
조선총독부관보(1910.10.7)(1921.1.14) 등

[집필자]

문혜경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