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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열(朴泰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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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박종식(朴宗植)
생년1874(고종 11)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황해도 은율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박태열(朴泰烈)
1874년(고종 11)∼미상. 독립운동가. 본명은 종식(宗植). 황해도 은율 출신.

국권이 침탈되자 무력항쟁을 위해 1918년 만주로 건너가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근거를 둔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다.

그해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 등과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고, 1920년 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오동진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 결사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2월 장덕진김예호(金禮浩) 등과 평안북도 벽동군 강변에 있는 일본 헌병의 분파소(分派所) 두 곳을 습격하여 적을 사살하고 무기를 확보하였고, 다시 벽동학회(碧潼鶴會)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2명을 사살한 다음 그곳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렸다.

7월에는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장덕진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안경신(安敬信)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던 중 안주군 입석(立石)에서 일본경찰에게 검색을 당하자 이를 사살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만주본영으로 돌아왔으며, 평양지방법원의 궐석판결에서 종신형이 선고받았다.

또한, 같은해에 관전현에 광복군총영 통신사무부를 설치하고 각 방면의 독립단체와 연락을 취하였다.

1922년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박진(朴震)장덕진 등과 10명의 연서로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籌備會)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여 독립운동의 중단에 대한 구제책을 제시하였다.

1926년 나석주(羅錫疇)가 의거를 위해 귀국할 때 이화익(李化翼)최천호(崔天浩) 등과 같이 무기와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1934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평안남도 성천에서 일본경찰에 잡혔다.

1936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서울서대문형무소로 이감, 복역하다가 옥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史硏究所, 1971)
독립운동사 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집필자]

김광남(金光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