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락(朴京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ACBDB77DB1871X0 |
생년 | 1871(고종 8) |
졸년 | 1939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부 | 박만조(朴萬祚) |
출신지 | 전라북도 순창 |
공훈 | 건국포장 |
[상세내용]
박경락(朴京洛)
1871년(고종 8)∼1939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전라북도 순창 출신. 박만조(朴萬祚)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최익현(崔益鉉)이 거의하여 1906년 6월 태인(泰仁)‧순창(淳昌) 등지에서 활약할 때 인근의 포수들을 규합하여 그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최산흥의 보부상 부대와 합세하여 그해 10월경 일본군수비대를 격살하였다.
1908년 6월 의병장 양윤숙(梁允淑)이 동지를 규합하여 거의하자, 이에 가입하여 도포장(都砲將)이 되었다.
1909년 1월 중순경 동지 60여명과 함께 총 40자루를 휴대하고 순창군내의 여러 마을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1월 26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최익현(崔益鉉)이 거의하여 1906년 6월 태인(泰仁)‧순창(淳昌) 등지에서 활약할 때 인근의 포수들을 규합하여 그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최산흥의 보부상 부대와 합세하여 그해 10월경 일본군수비대를 격살하였다.
1908년 6월 의병장 양윤숙(梁允淑)이 동지를 규합하여 거의하자, 이에 가입하여 도포장(都砲將)이 되었다.
1909년 1월 중순경 동지 60여명과 함께 총 40자루를 휴대하고 순창군내의 여러 마을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1월 26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光州地方裁判所 全州支部判決文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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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