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한일(郭漢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FDD55CC77CB1869X0 |
자(字) | 원우(元佑) |
호(號) | 장암(壯菴) |
생년 | 1869(고종 6) |
졸년 | 1936 |
시대 | 조선후기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출신지 | 충청남도 아산 |
공훈 | 건국포장 |
[상세내용]
곽한일(郭漢一)
1869년(고종 6)∼1936년. 의병장. 자는 원우(元佑), 호는 장암(壯菴). 충청남도 아산 출신.
1896년 전기 의병항쟁기에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鎭衛隊)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06년 봄에는 홍산(鴻山)‧보령 지방에서 민종식(閔宗植)을 중심으로 한 홍주(洪州: 洪城)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 등과 활동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그뒤에도 창의를 위한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다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96년 전기 의병항쟁기에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鎭衛隊)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06년 봄에는 홍산(鴻山)‧보령 지방에서 민종식(閔宗植)을 중심으로 한 홍주(洪州: 洪城)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 등과 활동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그뒤에도 창의를 위한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다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朝鮮獨立運動Ⅰ(金正明編,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韓國獨立史(金承學, 統一問題硏究所, 1972)
朝鮮獨立運動Ⅰ(金正明編,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韓國獨立史(金承學, 統一問題硏究所, 1972)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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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