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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金躍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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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규암(圭巖)
생년1868(고종 5)
졸년1942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함경북도 회령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약연(金躍淵)
1868년(고종 5)∼1942년.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규암(圭巖). 함경북도 회령 출신.

1899년 함경북도 종성으로부터 김정규(金定圭)문정호(文政鎬)문치정(文治政) 등 10여가구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만주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간도명동(明東)에 자리잡은 이들은 동가(董家)라는 중국인의 임야 수백 정보를 구입하여 개간을 서두르면서 한인마을을 만들었다. 농삿일을 하면서 인재를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고 규암재(圭巖齋)라는 사숙(私塾)을 설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외로 망명하여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숙장(塾長) 이상설고종의 밀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떠난 것과 함께 통감부의 간도파출소에 대한 간섭이 심하여지자, 서전의숙은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서전의숙에 적을 두었던 그의 종제인 김학연명동으로 돌아오는 것을 계기로,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였다.

42명의 학생으로서 문을 연 명동서숙은 명예숙장에 박무림(朴茂林),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교사에 김학연남위언(南葦彦)김하규(金河奎)가 한문‧수학‧역사 등을 가르쳤다.

1909년 서울 청년학관출신인 정재면(鄭載冕)을 교사로 받아들이면서 기독교교육으로 전환하였으며, 학교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어 1910년 3월에는 명동중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황의돈(黃義敦)박태환(朴泰煥)장지영(張志暎)김철(金哲) 등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하여왔다.

1911년 명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7년 9월에는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만들어 그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18년에는 간민회(墾民會)를 창설하여 그 회의 간사로서 자활운동을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1919년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 후에 대한국민의회로 개칭)에 참석하기 위하여 러시아 니콜리스크회의에 참석하였다. 이해 3월 간도 용정의 만세사건과 명동학교의 전소 및 상해임시정부 각료로의 추대소식을 듣고 간도로 돌아오다가, 중국정부에 연금되어 연길(延吉)감옥에서 3년간 구금당하였다.

1925년 명동중학교가 용정(龍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편입됨에 따라 그가 15년 동안 가꾸고 다듬었던 교육사업은 축소되었고, 명동소학교 유지에만 힘을 쏟게 되었다.

1929년에 평양장로교신학교에서 단 1년간의 연구수업으로 졸업장을 받아, 명동교회 목사로서 목회일도 주관하였다.

1937년 용정으로 이사와 은진중학교 이사장으로서 교육일선에서 물러나 뒷바라지를 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獨立運動史(崔南善, 東明社, 1946)
韓國獨立運動史 2(國史編纂委員會, 1966)
韓國流移民史 上(玄圭煥, 語文閣, 1967)
間島問題(吳世昌‧金正柱, 韓國史料硏究會, 1968)

[집필자]

김호일(金鎬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