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제안(梁濟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91C81CC548B1860X0 |
호(號) | 벽도(碧濤) |
생년 | 1860(철종 11) |
졸년 | 1929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남원(南原)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출신지 | 경상북도 영일 |
공훈 | 건국포장 |
[상세내용]
양제안(梁濟安)
1860년(철종 11)∼1929년. 의병장‧독립운동가.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벽도(碧濤). 경상북도 영일 출신.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척왜를 주장하였으며,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1895년 이기찬(李起燦)의병진의 중대장으로 허위(許蔿) 등과 청산‧보은‧괴산‧청주‧음성 등지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1905년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6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영남 지방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될 때 상주‧선산 지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산남의진의 봉기 후 주로 진후(陣後)에서 활약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척왜를 주장하였으며,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1895년 이기찬(李起燦)의병진의 중대장으로 허위(許蔿) 등과 청산‧보은‧괴산‧청주‧음성 등지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1905년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6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영남 지방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될 때 상주‧선산 지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산남의진의 봉기 후 주로 진후(陣後)에서 활약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山南義陣遺史(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韓國言論社, 1972)
山南義陣遺史(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韓國言論社, 1972)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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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