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종일(李鍾一)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885C77CB1858X0
호(號)옥파(沃坡)
호(號)천연자(天然子)
생년1858(철종 9)
졸년1925
시대조선후기
본관성주(星州)
활동분야언론출판 > 언론인
이교환(李敎煥)
출신지충청남도 서산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이종일(李鍾一)
1858년(철종 9)∼1925년. 언론인‧독립운동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묵암(黙菴)옥파(沃坡), 도호(道號)는 천연자(天然子). 충청남도 서산 출신. 이교환(李敎煥)의 맏아들이다.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2세교육에 힘썼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그 막후에서 민권의식과 민권사상 고취에 노력하였으며,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여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 청년애국회에 관여하였으며, 개화사상을 촉진, 보급시켰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의 신서적을 통하여 전래적인 실학에서의 주상적(主商的)인 해외교류의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신문사업을 실학운동의 재현으로 인식, 이해하였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이 창간한 『경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한 경험을 살려 개화사상가 유영석(柳永錫)장효근(張孝根)이종면(李鍾冕)이종문(李鍾文) 등 이문사(以文社)관계인의 권유와 추대로 그해 8월 『제국신문』을 순 한글로 창간하였다.

1910년까지 10여년간 사장 겸 기자로서 언론계에서 개화와 계몽‧구국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황성신문』『만세보』『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 참여하다가 1919년에는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05년 12월 홍산(鴻山)의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손병희(孫秉熙)와는 『제국신문』 창간 당시부터 교분이 있었다. 천도교에 입교한 뒤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으로 월보를 발행, 집필하는 한편,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의 사장으로 천도교관계 각종 서적을 간행하였다.

1906년 9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이 회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되자, 1907년 그 후신으로 조직된 대한협회의 회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항하였다.

1912년 천도교의 풍족한 재정과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 1904년 갑진개화신생활운동을 1914년 갑인년에 재현하는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2월 27일 밤 장효근김홍규(金弘奎)신영구(申永求) 등과 협력,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독립선언문 3만5000장을 인쇄하여 인종식(印宗植)간사를 통하여 전국에 배포, 3‧1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3‧1운동으로 3년 복역중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였으나, 1922년 3월 1일 또다시 보성사팀과 같이 천도교 단독으로 제2의 3‧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三‧一運動秘史(李炳憲, 時事時報社, 1959)
開化期의 人物과 그 思想―黙菴備忘錄을 中心으로―(李炫熙, 韓國思想 17, 1980)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