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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姜宇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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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찬구(燦九)
호(號)왈우(曰愚)
생년1859(철종 10)
졸년1920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남도 덕천
묘소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감옥공동묘지
묘소서울 우이동
묘소동작동 국립묘지
공훈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상세내용]

강우규(姜宇奎)
1859년(철종 10)∼1920년. 독립운동가.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 본관은 진주(晉州). 평안남도 덕천 출신.

가난한 농가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나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동안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하여 한약방을 열었으며 또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뜻있는 동료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의논하였다.

1915년부터는 요하현(饒河縣)으로 옮겨 산 뒤에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주 내왕하면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꾀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1917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 길림성지부장(新韓村老人團吉林省支部長)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해 5월 노인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히자, 이에 분개한 나머지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총독 등 요인암살을 결심하였다.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 동지와 거사계획을 세우고, 8월에 서울에 잠입하여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부임차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에 오를 때, 그를 격살하고자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철이사(滿鐵理事),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었다. 이 거사에서 총독 사이토는 화를 입지 않았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년 3월 경성지방법원 1회공판 당시 최자남허형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되었고, 그는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유해는 광복 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감옥공동묘지로부터 서울 우이동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1962년 3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每日申報
독립운동사 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이미지]

[집필자]

박용옥(朴容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22국가보훈처 자료를 참고하여 생년을 1955년에서 1959년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