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규식(洪奎植)
[상세내용]
홍규식(洪奎植)
생졸년 미상. 조선 말기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조부는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이고, 부친은 참판(參判) 홍승억(洪承億)이다.
풍산 홍씨 집안에 시집간 숙선옹주(淑善翁主)가 자식이 없자 그가 가계(家系)를 계승할 자손이 되었는데, 1887년(고종 24) 숙선옹주의 사손(嗣孫)으로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890년(고종 27) 4월 17일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승하할 때 그는 예릉참봉(睿陵參奉)에 재직 중이었는데, 국상에서 종척에게 시키던 임시벼슬인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 1905년(광무 9) 그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자 전참서관(前參書官) 홍범식(洪範植)의 둘째 아들 홍명희(洪明熹)로 하여금 숙선옹주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청하자 예식원(禮式院)에서 명을 받들도록 하였다. 1906년(광무 10) 덕릉(德陵)‧안릉(安陵)‧지릉(智陵)‧숙릉(淑陵)‧순릉(純陵)‧정릉(定陵)‧화릉(和陵)의 비각을 영건(營建)하고 표석(表石)을 세울 때 감독관의 소임을 수행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908년(융희 2) 시종(侍從)에 재직 중이었을 때 임금의 명으로 의녕원(懿寧園)과 효창원(孝昌園)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 이후 관료들에게 품계를 가자하였는데, 이때 정3품에서 종2품으로 가자되었다. 1916년 숙선옹주의 묘소를 수선하는 비용으로 일금 300원을 하사받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高宗)의 국상을 치를 때 남작(男爵)의 신분으로 종척집사가 되었다. 1921년 6월 28일 그의 처 김씨의 상(喪)에 일금 100원을 하사받았다. 1926년 4월 25일 순종(純宗)의 국상을 치를 때 자작(子爵)에 재직 중이었는데, 종척집사에 임명되었다. 아들은 홍명희(洪明喜)이다.
조부는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이고, 부친은 참판(參判) 홍승억(洪承億)이다.
풍산 홍씨 집안에 시집간 숙선옹주(淑善翁主)가 자식이 없자 그가 가계(家系)를 계승할 자손이 되었는데, 1887년(고종 24) 숙선옹주의 사손(嗣孫)으로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890년(고종 27) 4월 17일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승하할 때 그는 예릉참봉(睿陵參奉)에 재직 중이었는데, 국상에서 종척에게 시키던 임시벼슬인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 1905년(광무 9) 그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자 전참서관(前參書官) 홍범식(洪範植)의 둘째 아들 홍명희(洪明熹)로 하여금 숙선옹주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청하자 예식원(禮式院)에서 명을 받들도록 하였다. 1906년(광무 10) 덕릉(德陵)‧안릉(安陵)‧지릉(智陵)‧숙릉(淑陵)‧순릉(純陵)‧정릉(定陵)‧화릉(和陵)의 비각을 영건(營建)하고 표석(表石)을 세울 때 감독관의 소임을 수행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908년(융희 2) 시종(侍從)에 재직 중이었을 때 임금의 명으로 의녕원(懿寧園)과 효창원(孝昌園)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 이후 관료들에게 품계를 가자하였는데, 이때 정3품에서 종2품으로 가자되었다. 1916년 숙선옹주의 묘소를 수선하는 비용으로 일금 300원을 하사받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高宗)의 국상을 치를 때 남작(男爵)의 신분으로 종척집사가 되었다. 1921년 6월 28일 그의 처 김씨의 상(喪)에 일금 100원을 하사받았다. 1926년 4월 25일 순종(純宗)의 국상을 치를 때 자작(子爵)에 재직 중이었는데, 종척집사에 임명되었다. 아들은 홍명희(洪明喜)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구은희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