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환(趙永煥)
[상세내용]
조영환(趙永煥)
1868년(고종 5)∼1910년(융희 4). 조선 말기 의병. 출신지는 함경남도 안변(安邊)이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1905년(광무 9)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았고 통감부를 설치하고, 1907년(융희 1) 헤이그특사 사건에 따른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일명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한국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적인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1909년(융희 3) 1월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활동 자금 확보를 위해 힘썼다. 이춘실(李春實)을 비롯한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총기를 지닌 채 함경남도 안변군 위익사(衛益社) 삼방동(三防洞)과 영풍사(永豊社) 금귀동 일대,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방장면(方丈面) 구당동(龜塘洞) 일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동촌(同村) 이화동(梨花洞) 등지에서 군자금을 거두었다. 11월 11일 황해도 곡산군 수암동에서 의병들을 일본 헌병에게 팔아넘긴 친일협력자 이사술(李士述)을 총살하였다. 그 일로 체포되어 1910년(융희 4)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에 따라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1905년(광무 9)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았고 통감부를 설치하고, 1907년(융희 1) 헤이그특사 사건에 따른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일명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한국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적인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1909년(융희 3) 1월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활동 자금 확보를 위해 힘썼다. 이춘실(李春實)을 비롯한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총기를 지닌 채 함경남도 안변군 위익사(衛益社) 삼방동(三防洞)과 영풍사(永豊社) 금귀동 일대,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방장면(方丈面) 구당동(龜塘洞) 일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동촌(同村) 이화동(梨花洞) 등지에서 군자금을 거두었다. 11월 11일 황해도 곡산군 수암동에서 의병들을 일본 헌병에게 팔아넘긴 친일협력자 이사술(李士述)을 총살하였다. 그 일로 체포되어 1910년(융희 4)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에 따라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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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