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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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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원두우(元杜尤)
생년1859(철종 10)
졸년1916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의료선교사
부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
모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sabeth Grant Marie)
처릴리아스 S. 홀튼(好敦, Lillias Stirling Horton)
자원한경(元漢慶, Horace Horton Underwood)
자부태요한(Ethel Van Wagoner)
손원일한(元一漢, Horace Grant Underwood)
손부조안 비다 데이비슨(Joan Vida Davidson)
증손원한광(元漢光, Horace Horton Underdwood)
증손부원은혜(Nancy K. Underdwood)

[상세내용]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년(철종 10) 7월 19일~1916년 10월 12일. 조선 말기 의료선교사.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베스(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 미국에서의 행적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가 되었다.
2. 교육과 전도활동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있으면서 조선말을 배웠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4월 7일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고아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 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1915년 3월 5일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이것이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3. 전도여행과 출판
언더우드는 3차에 걸쳐 북방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제1차는 1887년 가을에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을 여행했고 제2차는 1888년 봄에 아펜젤러와 함께 평양까지 갔다. 제3차는 1889년 봄에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등을 여행하였다.

언더우드는 조선과 교류를 위해 『한영문법』(1890)이란 문법서, 『한영사전』(1890) 같은 사전도 편찬하였다. 또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도 번역하였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4. 미국에서 숨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달렸는데, 이것이 그의 몸을 쇠약하게 하였다.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다가, 31년 전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했다가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지나 57세로 숨을 거두었다. 유니온 힐(Union Hill)에 묻혔다가 1999년 5월 20일 유해를 양화진 제2묘역 다-11 자리에 이장하였다.

저서는 『조선이 부르는 소리』(1908), 『동아시아의 종교』(1910)가 있다.

고종황제로부터 태극훈장을 받았고, 1963년 국가공로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집필자]

양창진(梁彰珍)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