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승(李建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C74C2B9B1858X0 |
자(字) | 보경(保卿) |
호(號) | 경재(耕齋) |
생년 | 1858(철종 9) |
졸년 | 192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상세내용]
이건승(李建昇)
1858년(철종 9)∼1924년. 조선 말기 학자‧문인. 자는 보경(保卿)이고, 호는 경재(耕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부친은 이상학(李象學)이다. 형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 제종형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이 있다.
강화학파의 학맥을 이어 양명학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건방과 함께 담헌(薝園) 정인보(鄭寅普)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불합리하게 체결되자 홍승헌(洪承憲)‧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자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광무 10)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세워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자강회를 도왔다. 1910년(융희 4) 8월 29일 국권(國權)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만주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저서로 필사본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가 전한다.
부친은 이상학(李象學)이다. 형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 제종형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이 있다.
강화학파의 학맥을 이어 양명학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건방과 함께 담헌(薝園) 정인보(鄭寅普)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불합리하게 체결되자 홍승헌(洪承憲)‧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자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광무 10)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세워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자강회를 도왔다. 1910년(융희 4) 8월 29일 국권(國權)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만주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저서로 필사본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가 전한다.
[참고문헌]
薝園文錄
江華學 최후의 광경(閔泳珪, 又半, 1994)
江華學 최후의 광경(閔泳珪, 又半, 1994)
[집필자]
김혜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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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