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백낙신(白樂莘)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31B099C2E0U9999X0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관료 > 탐관오리

[상세내용]

백낙신(白樂莘)
생졸년 미상. 조선 말기의 탐관(貪官).

1858년(철종 9)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861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1년도 못 되는 기간에 6개 조목에 걸쳐 불법수탈로 사취(私取)한 쌀이 약 1만5000석(4만5000냥 상당)이 되었다.

그밖에 진주목(晉州牧)의 농민에게 도결(都結: 지방관리가 공전이나 군포를 사취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결세를 정액 이상 받아내는 것) 총 2만8000여석과 환포(還逋: 지방관리가 환곡의 분급‧수납 과정에서 불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 총 2만4000여석을 합한 쌀 5만2000여석(15만6000여냥 상당)을 일시에 분납, 상납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격분한 유계춘(柳繼春)김수만(金守滿)이귀재(李貴才) 등이 민중을 모아 1862년 2월 18일에 봉기하였다. 이것이 곧 진주민란으로, 백낙신의 불법수탈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게 되었으며, 당시 전국 30여개 지방에서 일어난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진주안핵사 박규수(朴珪壽)경상우도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 등의 계청에 따라 백낙신전라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귀양보내고, 재산은 몰수하였다.

1863년 7월 전리(田里)로 방축되었다가, 1865년(고종 2)에 풀려났다.

이듬해 영종진첨절제사(永宗鎭僉節制使)로 강임되어 부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경기중군(京畿中軍)을 겸하여 영종진과 행주(幸州)를 지켰다.

그뒤 1877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1885년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은 죄로 다시 귀양가게 되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日省錄
高宗實錄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대표명백낙신(白樂莘)
낙신(樂莘)
성명백낙신(白樂莘), 백악신(白樂莘)

명 : "낙신(樂莘)"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開城赴援錄(高宗3年丙寅,1866)v1樂莘 復以同謀固請之致五 終不許之樂莘 曰松都大處也抱才者多矣薦人可乎致五 曰才難不其然乎薦亦非難乎樂莘 曰子爲其難致五 良久曰人各爲其鄕且所抱之人亦有所操則肯屈於此時節乎樂莘 曰陳平非無知不進武侯非水鏡
開城赴援錄(高宗3年丙寅,1866)v1已分矣復睡一睡白兵使博覽武經明達軍務應擧擇人而赴永宗五日後到此也翌朝復以軍事藥鄕俗詰之致五 隨問隨答樂莘 復以同謀固請之致五 終不許之樂莘 曰松都大處也抱才者多矣薦人可乎致五 曰才難不其然乎薦亦非難乎樂莘
開城赴援錄(高宗3年丙寅,1866)v1五 曰才難不其然乎薦亦非難乎樂莘 曰子爲其難致五 良久曰人各爲其鄕且所抱之人亦有所操則肯屈於此時節乎樂莘 曰陳平非無知不進武侯非水鏡不遇古今成大功者皆得人願借一人致五 曰姜姓載璜 家貧以醫學行世以醫請之庶
開城赴援錄(高宗3年丙寅,1866)v1務應擧擇人而赴永宗五日後到此也翌朝復以軍事藥鄕俗詰之致五 隨問隨答樂莘 復以同謀固請之致五 終不許之樂莘 曰松都大處也抱才者多矣薦人可乎致五 曰才難不其然乎薦亦非難乎樂莘 曰子爲其難致五 良久曰人各爲其鄕
勅使日記v18而本道贈給銀子三千五百七十兩內上副勅房各四百兩通官及頭目等處二千七百七十兩依例入給土產各種段備載於臣樂莘別啓中故是如爲白有等以緣由馳啓云云啓下迎接都監平安監司狀啓勅行龍灣舘留住之由已爲馳啓爲白有在果卽接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