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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李址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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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이은용(李垠鎔)
자(字)경천(景川)
호(號)향운(響雲)
생년1870(고종 7)
졸년1928(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친일

[상세내용]

이지용(李址鎔)
1870년(고종 7)∼1928년. 조선 말기의 친일파‧민족반역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은용(李垠鎔). 자는 경천(景川), 호는 향운(響雲). 완영군(完永君) 이재긍(李載兢)의 아들이고, 생부는 이희하(李熙夏)이다. 외조부는 남양홍씨(南陽洪氏[土]) 홍훈(洪坃)이고, 처부는 풍산홍씨(豊山洪氏) 홍우석(洪祐奭)이다.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였다. 이해에 규장각대교를 지낸 뒤 이듬해에는 주천(注薦)에 들고 시강원설서가 되었다.

1889년 시강원 겸 문학이 되었고, 1890년 이조정랑시강원설서 겸 필선부사과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93년 이조참의에 올랐으며,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왕태자궁(王太子宮)대부(大夫)가 되었고,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96년 시강원부첨사(侍講院副詹事)를 지냈고, 1897년 사직서제조(社稷署提調)왕태자궁시강원첨사(王太子宮侍講院詹事)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

1898년 장례원소경(掌禮院少卿)이 되었고, 1899년 황해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1900년에 궁내부협판이 되고 이듬해 주일전권공사의정부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를 지낸 뒤 이듬해 2월 23일에는 외부대신서리로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협정, 조인하였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이 상당히 높아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그와 참사관인 통역 구완희(具完喜)를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그 대책으로 추밀원의장이토(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그를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귀국한 뒤 법부대신규장각학사판돈녕부사교육부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역임하였는데,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을 받고, 격앙된 군중에 의하여 집이 방화되었다.

1907년 5월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고,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文品案
大韓帝國官員履歷書
大韓季年史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