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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봉(文錫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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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필(而弼)
호(號)의산(義山)
생년1851(철종 2)
졸년1896(건양 1)
시대조선후기
본관남평(南平)
활동분야호국 > 의병
문하규(文夏奎)
출신지대구

[상세내용]

문석봉(文錫鳳)
1851년(철종 2)∼1896년.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 대구 출신. 아버지 문하규(文夏奎)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3년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 경복궁 오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12월 공주부 진잠(鎭岑)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로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연산은진공주부내 인근 6읍의 사민들은 그를 위한 송덕비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이 지역 유생들과의 관계유지는 경상도 출신인 그가 진잠을 비롯한 유성회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개화정권에 의하여 취해진 변복령과 단발령 등 제도의 개편을 반대하였으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물리치고자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의병활동은 2차에 걸쳐 준비, 수행되었다.

1차 의병활동은 그가 붙잡혀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1895년 2월경 무기를 준비하는 등 의병투쟁의 준비단계로서 의의가 있다.

2차 의병활동은 을미사변 직후에 시작되었다.

1895년 9월 18일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들고 충청도 유성에서 유성의진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 선봉장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에 오형덕(吳亨德), 군향관에 송도순(宋道淳)을 임명하였다. 유성의진의 병사수는 1,000여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먼저 회덕진잠에 거주하던 송근수(宋近洙)신응조(申應朝) 등 전임 정승들의 찬동하에 회덕군아의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장하였다.

이어 진잠을 거쳐 공주부 관아를 점령하고자 진격하였다. 그가 병법에 능한 무과출신이고 전투지휘 경험이 있는 무장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상도지역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오형덕 등과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고령현감의 밀고로 1895년 11월 대구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1896년초 동지들과 파옥하여 원주일대에서 통문을 돌리며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며 얻은 병으로 그해 5월 낙향하여 결국 11월에 죽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을미의병의 기점으로서 단발령 직후 전개되는 반일의병투쟁의 촉발제 구실을 수행한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는 『의산수록(義山隨錄)』 2책이 전해오고 있으며, 1934년 이를 저본으로 하여 후손들이 간행한 『의산유고(義山遺稿)』 2책이 있다.

[참고문헌]

義山遺稿
朝鮮末 文錫鳳의 儒城義兵(金祥起, 歷史學報 134‧135 합집, 1992)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