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준(成一濬)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31C77CC900B1850X0 |
자(字) | 관겸(貫兼) |
호(號) | 계와(桂窩) |
생년 | 1850(철종 1) |
졸년 | 1929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성진덕(成鎭德) |
조부 | 성양로(成養魯) |
증조부 | 성만지(成萬祉) |
처부 | 김필재(金畢齋) |
외조부 | 박규연(朴奎淵) |
출신지 |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궁유면(宮柳面) 계현리(桂峴里) |
묘소 | 수곡(壽谷) |

[상세내용]
성일준(成一濬)
1850년(철종 1)∼1929년. 조선 말기 유학자이다. 자는 관겸(貫兼)이고, 호는 계와(桂窩)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궁유면(宮柳面) 계현리(桂峴里) 출신이다.
증조부는 성만지(成萬祉), 조부는 진사(進士) 성양로(成養魯), 부친은 성진덕(成鎭德)이다. 외조부는 순천박씨(順天朴氏) 박규연(朴奎淵)이며, 처부는 선산(善山) 김필재(金畢齋)이다.
성일준은 1875년(고종 12) 서울에서 만든 대동보가 옛날의 규례와 맞지 않자 단자(單子)를 들고 내려와 버렸다. 1877년(고종 14)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불권당(不倦堂)에서 뵙고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한 강론을 들은 후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1888년(고종 25) 그는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삼년상이 끝난 후에 후산(后山) 허유(許愈)를 따라 공부하였다. 1891년(고종 28) 그가 삼가현(三嘉峴) 안산(案山)에 우거하고 있을 때, 지주 신두선(申斗善)이 제의하고 후산(后山) 허유(許愈)와 노백(老柏) 정재규(鄭載圭)가 주동하여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뇌용정(雷龍亭)을 중건하고 춘추로 강론을 폈다. 성일준(成一濬) 또한 이에 참여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다지는 데 힘썼다. 지역의 선비들은 “경술년에 태어난 세 사람 중,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는 명절(名節)이 높고, 계와(桂窩) 성일준(成一濬)은 기량(器量)이 좋고, 소와(素窩) 허찬은 유학이 좋다”고 평하였다.
묘소는 수곡(壽谷) 선영(先塋) 아래 있다.
증조부는 성만지(成萬祉), 조부는 진사(進士) 성양로(成養魯), 부친은 성진덕(成鎭德)이다. 외조부는 순천박씨(順天朴氏) 박규연(朴奎淵)이며, 처부는 선산(善山) 김필재(金畢齋)이다.
성일준은 1875년(고종 12) 서울에서 만든 대동보가 옛날의 규례와 맞지 않자 단자(單子)를 들고 내려와 버렸다. 1877년(고종 14)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불권당(不倦堂)에서 뵙고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한 강론을 들은 후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1888년(고종 25) 그는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삼년상이 끝난 후에 후산(后山) 허유(許愈)를 따라 공부하였다. 1891년(고종 28) 그가 삼가현(三嘉峴) 안산(案山)에 우거하고 있을 때, 지주 신두선(申斗善)이 제의하고 후산(后山) 허유(許愈)와 노백(老柏) 정재규(鄭載圭)가 주동하여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뇌용정(雷龍亭)을 중건하고 춘추로 강론을 폈다. 성일준(成一濬) 또한 이에 참여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다지는 데 힘썼다. 지역의 선비들은 “경술년에 태어난 세 사람 중,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는 명절(名節)이 높고, 계와(桂窩) 성일준(成一濬)은 기량(器量)이 좋고, 소와(素窩) 허찬은 유학이 좋다”고 평하였다.
묘소는 수곡(壽谷) 선영(先塋) 아래 있다.
[참고문헌]
桂窩先生文集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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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