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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金明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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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848(헌종 14)
졸년1898(광무 2)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김명규(金明圭)
1848년(헌종 14)∼1898년(광무 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서울 출신.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내정에 개입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납치해간 뒤 그를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씨정권은 당시 승정원동부승지로 있던 김명규를 문의관(問議官)으로 톈진(天津)에 파견, 그 반대운동을 벌였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89년에 톈진 주재 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의 직함을 가지고 주로 대외적인 일에 종사하였다.

1892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지냈고, 그뒤 농상공부대신학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898년 당시 의정부참정 박정양(朴定陽)이 관민공동회 발기인 윤치호(尹致昊)에게 정부측 요인들이 관민공동회에 참석할 뜻을 비추자, 이에 동의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관민공동회에 관계한 인사들을 모략하기 위해 이른바 익명서사건을 조작하여, 고종이 독립협회의 해산령을 내리고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가(可)’자를 쓴 대신들을 해임시킬 때 함께 면직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되어 임시서리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事務)학부대신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윤경로(尹慶老)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6-10문과방목을 참고하여 본관 안동 추가.
2010-06-10『梅泉野錄』 제2권을 참고하여 졸년 1898년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