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柳𤩵)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20C11DFFFFB1841X0 |
자(字) | 공필(公弼) |
생년 | 1841(헌종 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유승근(柳承根) |
외조부 | 박간(朴幹) |
[상세내용]
유석(柳𤩵)
1841년(헌종 7)∼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필(公弼). 유승근(柳承根)의 아들로 모친은 박간(朴幹)의 딸이다.
1871년(고종 8) 친림경무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민비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874년 1월 의정부의 추천으로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어 평해‧강릉의 허결(虛結)을 탕감할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1883년 충청좌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삼정(三政)의 폐해, 수령과 향리의 부정을 규찰하였다. 다음해 경흥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서 중화부에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각지에 큰 흉년이 들고, 화적이 횡행하던 1886년 경상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또, 1889년에는 내무부참의로서 전주의 이서(吏胥)가 관노(官奴)를 학대하여 일어난 소요를 진압, 조사하기 위한 안핵사가 되었다.
1894년 대사간을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났다.
1871년(고종 8) 친림경무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민비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874년 1월 의정부의 추천으로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어 평해‧강릉의 허결(虛結)을 탕감할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1883년 충청좌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삼정(三政)의 폐해, 수령과 향리의 부정을 규찰하였다. 다음해 경흥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서 중화부에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각지에 큰 흉년이 들고, 화적이 횡행하던 1886년 경상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또, 1889년에는 내무부참의로서 전주의 이서(吏胥)가 관노(官奴)를 학대하여 일어난 소요를 진압, 조사하기 위한 안핵사가 되었다.
1894년 대사간을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났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장영민(張泳敏)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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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