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석(安寅錫)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548C778C11DB1838X0 |
| 자(字) | 하건(夏建) |
| 호(號) | 만우(晩愚) |
| 생년 | 1838(헌종 4) |
| 졸년 | 1908(융희 2) |
| 시대 | 조선후기 |
| 본관 | 순흥(順興) |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 부 | 안두유(安斗維) |
| 조부 | 안수희(安守喜) |
| 증조부 | 안야(安壄) |
| 처부 | 조성린(趙性麟) |
| 외조부 | 여문행(呂文行) |
| 출신지 | 경상남도 마산시(馬山市) 두척동(斗尺洞) |
| 묘소 |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상검암(上儉巖) |
| 저서 | 『만우안공유고(晩愚安公遺稿)』 |

[상세내용]
안인석(安寅錫)
1838년(헌종 4)∼1908년(융희 2).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하건(夏建), 호는 만우(晩愚)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출신지는 경상남도 마산시(馬山市) 두척동(斗尺洞)이다.
증조부는 안야(安壄), 조부는 안수희(安守喜), 부친은 안두유(安斗維)이다. 외조부는 성산여씨(星山呂氏) 여문행(呂文行)이며, 처부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조성린(趙性麟)이다.
어려서부터 재질과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다. 늘 정성스럽게 부모를 섬겼으므로 가정이 화목하였다.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큰어머니를 어머니와 똑같이 모셨고, 조카를 친자식처럼 길렀으며, 큰아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였다.
향리의 일에도 성의를 다하였다. 매년 춘추에 강회를 열어 권선징악을 강론하고, 과계(科契)와 동계(洞契)를 만들어 다음번 과거 응시 및 노인 봉양, 강학에 필요한 자금에 대비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국가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1907년(융희 1) 강압적으로 정미7조약을 체결시켰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하며 은둔하여 지내다가, 향년 71세에 사망하였다.
묘지는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상검암(上儉巖) 후산(后山) 해좌원(亥坐原)이다. 시문집으로 『만우안공유고(晩愚安公遺稿)』가 전해진다.
증조부는 안야(安壄), 조부는 안수희(安守喜), 부친은 안두유(安斗維)이다. 외조부는 성산여씨(星山呂氏) 여문행(呂文行)이며, 처부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조성린(趙性麟)이다.
어려서부터 재질과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다. 늘 정성스럽게 부모를 섬겼으므로 가정이 화목하였다.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큰어머니를 어머니와 똑같이 모셨고, 조카를 친자식처럼 길렀으며, 큰아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였다.
향리의 일에도 성의를 다하였다. 매년 춘추에 강회를 열어 권선징악을 강론하고, 과계(科契)와 동계(洞契)를 만들어 다음번 과거 응시 및 노인 봉양, 강학에 필요한 자금에 대비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국가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1907년(융희 1) 강압적으로 정미7조약을 체결시켰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하며 은둔하여 지내다가, 향년 71세에 사망하였다.
묘지는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상검암(上儉巖) 후산(后山) 해좌원(亥坐原)이다. 시문집으로 『만우안공유고(晩愚安公遺稿)』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晩愚安公遺稿
[집필자]
전주원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