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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응중(南膺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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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10(순조 10)
졸년1836(헌종 2)
시대조선후기
본관의령(宜寧)
활동분야변란 > 모반인
남이수(南履綏)
조부남채로(南綵老)

[상세내용]

남응중(南膺中)
1810년(순조 10)∼1836년(헌종 2). 조선 후기의 반역자. 본관은 의령(宜寧).

조부는 남채로(南綵老)이며, 부친은 남이수(南履綏)이다.

서울에서 살았으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피난한다는 핑계로 충청도 목천현(木川縣) 곡간리(曲澗里)로 이주하였다.

1836년 남경중(南慶中)남공언(南公彦)문헌주(文憲周)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모의내용은 사언군(思彦君)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여 자신은 도총집(都摠執),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먼저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흥의 이속(吏屬) 천기영(千璣英)이 사전에 고변함으로써 이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동래에 있는 왜관에 들어가 왜인들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거절당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잡혀서 우리 관헌에게 인도되었다. 이에 정부는 그를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능지처참하여 그 수급을 왜관에 현시(懸示)하게 하였다.

또한 이 모의에 가담한 남경중남공언문헌주 등 20여명을 극형에 처하였다. 고변자인 천기영은 대왕대비의 명령으로 오위장의 벼슬이 주어졌으며, 일본과의 우의를 두텁게 하는 의미에서 범인을 잡아 인도하여준 왜관의 관수왜(館守倭)에게는 은자(銀子) 1천냥을 보내어 고마운 뜻을 전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承政院日記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