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현(朴文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BB38D604B1798X0 |
자(字) | 경숙(敬叔) |
호(號) | 유정(酉亭) |
생년 | 1798(정조 22) |
졸년 | 1875(고종 1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순천(順天) |
활동분야 | 문신 |

부 | 박기녕(朴基寧) |

[상세내용]
박문현(朴文鉉)
1798년(정조 22)~1875년(고종 12).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숙(敬叔)이고 호는 유정(酉亭)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거주지는 대구(大丘)이다.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별검(別檢) 박성준(朴聖俊)이고, 조부는 박광호(朴光昊)이며, 부친은 박기녕(朴基寧)이다. 외조부는 윤치정(尹致禎)이고, 처부는 권인호(權仁祜)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시에서 병과 10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순천부사(順天府使)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 육조(六條)의 진면소(陳勉疏)를 올렸을 때,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852년(철종 3)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할 때 양사(兩司)의 인물인 대사헌(大司憲) 오취선(吳取善)과 대사간(大司諫) 박종휴(朴宗休) 등과 함께 상소하여 유배 중이던 이응식(李應植) 등의 유배처를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는 왕의 명령을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가 체차(遞差)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순조대왕추상존호대왕대비전가상존호도감의궤(純祖大王追上尊號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儀軌)』를 편찬할 때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859년(철종 10)에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재임하던 중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정재영(丁載榮)이 올린 소장에 이름이 들어가 벼슬을 잃기도 하였다. 또 순천부사로 있을 때 안악군수로 재임하던 때의 죄로 인해 원악도(遠惡島)의 유배형에 처해졌다.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별검(別檢) 박성준(朴聖俊)이고, 조부는 박광호(朴光昊)이며, 부친은 박기녕(朴基寧)이다. 외조부는 윤치정(尹致禎)이고, 처부는 권인호(權仁祜)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시에서 병과 10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순천부사(順天府使)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 육조(六條)의 진면소(陳勉疏)를 올렸을 때,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852년(철종 3)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할 때 양사(兩司)의 인물인 대사헌(大司憲) 오취선(吳取善)과 대사간(大司諫) 박종휴(朴宗休) 등과 함께 상소하여 유배 중이던 이응식(李應植) 등의 유배처를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는 왕의 명령을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가 체차(遞差)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순조대왕추상존호대왕대비전가상존호도감의궤(純祖大王追上尊號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儀軌)』를 편찬할 때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859년(철종 10)에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재임하던 중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정재영(丁載榮)이 올린 소장에 이름이 들어가 벼슬을 잃기도 하였다. 또 순천부사로 있을 때 안악군수로 재임하던 때의 죄로 인해 원악도(遠惡島)의 유배형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철종실록
[집필자]
유치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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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