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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억(柳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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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년(大年)
호(號)원석(圓石)
생년1796(정조 20)
졸년1852(철종 3)
시대조선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무신 > 무신
출생지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저서『원석유고(圓石遺稿)』

[상세내용]

유억(柳億)
1796년(정조 20)∼1852년(철종 3). 조선 후기 무신. 자는 대년(大年)이고, 호는 원석(圓石)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운조루(雲鳥樓)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운조루를 창건(創建)한 유이주(柳爾胄)의 사촌 동생 유이익이다. 숙부는 유이익의 2남이자 유이주에게 입적하여 운조루의 두 번째 주인이 된 유덕호(柳德浩)이고, 부친은 유이익의 9남 유광호이다. 30세에 무과 급제 후 관직은 함경도감영중군(咸鏡道監營中軍)청주우후(淸州虞侯)안주우후(安州虞侯)평안도병마절제사 겸 토포사(平安道兵馬節制使兼討捕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당시 운조루에서는 해마다 200가마의 쌀을 수확했다. 운조루에는 나무로 만든 쌀뒤주가 있는데 그 뒤주 아래에 가로 5cm, 세로 10cm 크기의 구멍이 있다. 구멍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써놓았는데 누구나 그 구멍을 열어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는 뜻이다. 문화유씨(文化柳氏) 가문에서는 이 쌀뒤주에 관련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유억(柳億)이 쌀뒤주를 열어보니 쌀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즉시 며느리를 불러 ‘뒤주에 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덕을 베풀지 않았다는 증거이므로 당장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하고, 매달 그믐날에는 쌀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가 죽은 후 고을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우고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자녀로는 4남 유견용(柳見龍)유택선(柳宅善)유주선(柳籌善)유방선(柳邦善)을 두었다.

유집으로 『원석유고(圓石遺稿)』 1책을 필사본으로 남겼다. 그 책에는 당시에 수집하고 수장해둔 서첩(書帖)들이 있다. 그 외의 현존 유물로는 손자 유제양(柳濟陽)이 모아둔 그의 친필 ‘조선친필(祖先親筆)’이 있으며, 1822년에 그가 필사해둔 『여지승람(輿地勝覽)』 1책과 「여지도(輿地圖)」 1첩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구례군지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말 일제하 양반 소지주가의 농업경영 연구(http://krei.re.kr/kor/main.php)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