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서유훈(徐有薰)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11CC720D6C8B1795X0
자(字)계남(啓南)
시호(諡號)문경(文景)
생년1795(정조 19)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서기수(徐淇修)

[상세내용]

서유훈(徐有薰)
1795년(정조 19)~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계남(啓南)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서종벽(徐宗璧)이고, 조부는 서명민(徐命敏)이며, 부친은 서기수(徐淇修)이다. 외조부는 윤석동(尹晳東)이고, 처부는 김대종(金大鐘)이다. 형은 서유교(徐有喬)이고, 동생은 서유상(徐有象)이며, 서제는 서유승(徐有乘)이다.

1828년(순조 28) 식년시에 생원 3등 10위로 합격하였고, 1837년(헌종 3년) 정시에서 갑과 1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839년(헌종 5)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이 되고, 1840년(헌종 6) 평안남도암행어사(平安南道暗行御史)가 되었다. 1847년(헌종 13) 8월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1850년(철종 1)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어 그해 11월에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을 개수하는 공사를 감독하여 자급(資級)을 올려 받았다. 1851년(철종 2)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1852년(철종 3) 3월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으며, 4월에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854년(철종 5)에 사헌부대사헌이, 1856년(철종 7) 1월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8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 재차 한성부판윤으로 자리를 옮겼다.

1857년(철종 8) 4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거쳐 윤 5월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1858년(철종 9) 1월에는 다시 한성부판윤으로 봉직하였다. 잠시 뒤인 3월에는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에 임명되었다.

1859년(철종 10)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냈고, 1861년(철종 12) 6월 재차 형조판서를 거쳐 7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862년(철종 13)에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경학(經學)‧사학(史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 속편(續編) 편찬에 참여하였다.

최시옹(崔是翁)이 지은 『동강선생유고(東岡先生遺稿)』의 서문을 썼고,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 임자보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서정현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