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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수(徐淇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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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비연(斐然)
호(號)소재(篠齋)
생년1771(영조 47)
졸년1834(순조 34)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명민(徐命敏)
온양정씨(溫陽鄭氏)
외조부정창유(鄭昌兪)
저서『소재집』

[상세내용]

서기수(徐淇修)
1771년(영조 47)∼1834년(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비연(斐然), 호는 소재(篠齋).

황주목사 서명민(徐命敏)의 아들이며, 모친은 온양정씨(溫陽鄭氏)이조판서 정창유(鄭昌兪)의 딸이다.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하고, 1801년(순조 1) 증광시(增廣試)에 갑과(甲科) 3등으로 합격하여 한림원기거주(翰林苑起居注)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정치적 모함으로 함경도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5년에 걸친 유배생활 동안 오직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목석거(木石居)’라 부르고 일체 세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친지들과 함께 백두산을 유람한 뒤 그때의 기행문으로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를 썼다.

1825년 세자시강원문학, 1830년 성균관대사성, 1831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청빈한 생활에 자족하며 시작에 많은 정열을 쏟았다.

특히, 사영운(謝靈運)맹호연(孟浩然)두보(杜甫)를 흠모하였으며, 대체로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산수시를 많이 썼다.

저서로는 『소재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篠齋集

[집필자]

한여우(韓如愚)
대표명서기수(徐淇修)
기수(淇修)
성명서기수(徐淇修)

명 : "기수(淇修)"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待闡錄v9不可容貸者卽筵說圖改事也噫起居注事體所重何如當日筵說關係又何如而密嗾翰林徐淇修使之改擦句語變幻事實則淇修甘爲厥役百端誘脅竟爲注書之所堅捉未遂至憯之奸計萬古天下寧有如許變怪乎史冊記實金匱石室藏之名山以傳千萬
待闡錄v9欺天可欺乎此事忍爲何事不爲其設心造謀吁亦妖且凶矣此若不嚴處則其將壞敗我國法戕害我世道無復餘地請徐瀅修淇修有恂等三人竝投諸遠島云云李寅采李廷輪發配云云答曰省疏具悉徐瀅修李寅采等事已於左相疏批處分筵本圖改云云
待闡錄v9十二日禁府啓目徐有恂徐淇修等專事發明有恂之言則謂之只聞記注之漏落而已初非使之改也淇修之言則有恂之圖改的實而初無勸改於記注彼此爲說各自矛盾終不直陳所當請刑而侍從翰林勿爲請刑載在通編上裁何
待闡錄v9之推諉委罪之計有恂書辭果如淇修所供則其原書當在淇修處使之視納較看則眞僞自可綻露兩人更爲嚴問捧口招以聞淇修供辭中又以問於記注臣爲說伊日八侍注書及下番翰林處令政院問啓以入
待闡錄v9勿爲請刑載在通編上裁何如答兩人所供互相牴牾若非徐有恂之粧撰掉脫則必是徐淇修之推諉委罪之計有恂書辭果如淇修所供則其原書當在淇修處使之視納較看則眞僞自可綻露兩人更爲嚴問捧口招以聞淇修供辭中又以問於記注臣爲說伊
待闡錄v9何如答兩人所供互相牴牾若非徐有恂之粧撰掉脫則必是徐淇修之推諉委罪之計有恂書辭果如淇修所供則其原書當在淇修處使之視納較看則眞僞自可綻露兩人更爲嚴問捧口招以聞淇修供辭中又以問於記注臣爲說伊日八侍注書及下番翰林
待闡錄v9禁府徐有恂等更招內修之言則以爲有恂前日之書毁去不存徐有恂之言以爲別有贋本故所謂贋本使之現納於淇修則以爲自就理之初有恂以勿泄釐正二字百端哀乞贋本云云卽渠之發說而竝皆不從今此有恂之言可謂白地粧撰有恂若
待闡錄v9何敢添刪於其間乎至於日記冊則所重尤爲自別何敢恣意存拔乎萬萬不可爾若添刪於其間則厥罪當如何仍與元容嚴斥淇修更無語而起去其時事實不過如斯此外更無可達之辭云而問于假注書鄭元容處則以爲臣於伊日登筵時伏聆聖敎以大關
待闡錄v9似好云故臣曰吾之所錄則丁寧無左字不必多言而添書云云萬萬不可矣其時則下番翰林鄭觀綏亦在傍參聞言不可之狀淇修仍不提說而去其時事實不過如此更無可達之辭云矣敢啓答曰知道
待闡錄v9中左右相云臣筵本之只書右相似是漏落更爲書一左字云云故臣不勝駭妄以其莫重雖一字半書不敢加減之意據理以答淇修又爲來見而復提其事故一如前答曰左字之漏落與添書云云是何等說也筵中所聆旣是分明草冊所錄又是丁寧且伊日聖
待闡錄v9非疑難之事云而元容曰非但吾草冊中元無左右相之左字領相之只擧右相初筵筵奏仰奏者丁寧在耳則何可任自追改乎淇修曰然則謄書日記冊時以左右書之爲可云云元容一如前辭斥之臣亦謂元容曰大抵雖尋常筵說固不可惟意添刪況今此筵
待闡錄v9左相皆見之乎之敎領相仰奏以臣果得見則夫得見云者只屬右相事之下詢也非但語脈之如此記注所錄毫無差誤云爾則淇修曰吾草冊中有左字日記修正時添書似好云故臣曰吾之所錄則丁寧無左字不必多言而添書云云萬萬不可矣其時則下番
待闡錄v9發說而竝皆不從今此有恂之言可謂白地粧撰有恂若非贋書則必去釐正字若無釐正語則何足以破疑極口發明圖改一款淇修則謂以有恂書中丁寧有之屢次盤問一如前招有恂則圖改情節一向隱諱互相推諉終不直陳平問之下難以所服敎以不足
疏箚錄v30造謀吁亦妖且凶矣此輩之眼無國法縱恣無忌一至此哉此若不嚴處則其將壞敗我國法戕害我世道無復餘地臣謂徐瀅修淇修有恂等三人一竝放諸遠島永淸朝著斷不可已也臣於李寅采李廷輪事有所嫌端而此兩人之尙今不死刑政之倒置莫此爲
疏箚錄v30不可容貸者卽筵說圖改之事也起居注事體所重何如當日筵話關係又何如而密嗾翰林徐淇修使之改擦句語變幻事實則淇修甘爲厮役百端誘脅竟爲注書之所堅把未遂至憯之爲計萬古天下豈有如許變恠乎史冊記實金匱石室藏之名山以傳千萬
疏箚錄v30伏以臣等卽伏見徐有恂徐淇修更招判付下者有竝施竄配之命噫嘻此何擧也有恂淇修之罪實是往牒所未有之變恠也記注事體至嚴至重雖一字半句不敢私自增刪而況伊日筵話卽我聖上闡明義理遵守先志
疏箚錄v30已自來腸肚相連大小謀議無不綢繆所謂圖改者有恂淇修而使之圖改者邁修瀅修也今以鄭觀綏鄭元容問啓觀之則有恂淇修之前後情跡節節綻露鑿鑿符合罪人斯得宜施其律而奈之何逕庭酌處遽下竄配之命有若尋常罪囚之擬以從輕者然臣於
疏箚錄v30分之至嚴爲如何哉關係之莫重亦何如哉記注之臣奉以筆之於史冊雖一隻字謹嚴爲體自有史以來金石之規則噫彼有恂淇修輩圖改云者誠千古所未聞所未有之大變恠也有恂卽邁修之侄子也淇修卽瀅修之從弟也急於掉脫使有恂而密囑於淇修
疏箚錄v30未有之大變恠也有恂卽邁修之侄子也淇修卽瀅修之從弟也急於掉脫使有恂而密囑於淇修者非邁修而誰也欲其漫漶使淇修而屢懇於下番者非瀅修而誰也漏左之說登於附奏則邁修難掩其跡指揮之言發於臺章則瀅修焉逭其罪蓋邁修之與瀅修
疏箚錄v30跡指揮之言發於臺章則瀅修焉逭其罪蓋邁修之與瀅修非但族黨而已自來腸肚相連大小謀議無不綢繆所謂圖改者有恂淇修而使之圖改者邁修瀅修也今以鄭觀綏鄭元容問啓觀之則有恂淇修之前後情跡節節綻露鑿鑿符合罪人斯得宜施其律而
疏箚錄v30淇修輩圖改云者誠千古所未聞所未有之大變恠也有恂卽邁修之侄子也淇修卽瀅修之從弟也急於掉脫使有恂而密囑於淇修者非邁修而誰也欲其漫漶使淇修而屢懇於下番者非瀅修而誰也漏左之說登於附奏則邁修難掩其跡指揮之言發於臺章
疏箚錄v30隻字謹嚴爲體自有史以來金石之規則噫彼有恂淇修輩圖改云者誠千古所未聞所未有之大變恠也有恂卽邁修之侄子也淇修卽瀅修之從弟也急於掉脫使有恂而密囑於淇修者非邁修而誰也欲其漫漶使淇修而屢懇於下番者非瀅修而誰也漏左之
疏箚錄v30計雖未得遂有恂之書囑淇修之面懇已發於兩史臣問啓則不可但以圖改不成論之況圖改之心旣形則圖改之罪已成至於淇修則亦旣添書左字於渠之草冊則卽已圖改也身爲秉筆之臣作變於史草若是其無難而猶可免當施之律乎然而殿下視若尋
疏箚錄v30乃是義理之頭腦忠逆之關捩則雖一字半畫敢以無爲有恣意沬改乎何幸一二翰注之據義嚴斥奸計雖未得遂有恂之書囑淇修之面懇已發於兩史臣問啓則不可但以圖改不成論之況圖改之心旣形則圖改之罪已成至於淇修則亦旣添書左字於渠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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