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흠(姜浚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15C900D760B1768X0 |
자(字) | 백원(百源) |
호(號) | 삼명(三溟) |
생년 | 1768(영조 44)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진주(晉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강세정(姜世靖) |
외조부 | 권세억(權世檍) |
[관련정보]
[상세내용]
강준흠(姜浚欽)
1768년(영조 44)∼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원(百源), 호는 삼명(三溟).
부친은 강세정(姜世靖), 모친은 권세억(權世檍)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 등을 지냈다.
1805년(순조 5)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3년에 수안군수로 있을 때 군적(軍糴)의 폐단을 논하고 새로운 화폐의 주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부사직을 거쳐 1817년에 사간이 된 뒤 승지에 이르렀다.
벽파(僻派)의 일원으로 1801년 윤행임(尹行恁)의 축출에 앞장섰으며, 1813년 정약용(丁若鏞)의 석방을 반대하였다. 또,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비난하였다.
시무에 밝아 여러 번 어사 물망에도 올랐다. 서예에 능하여 금석문을 많이 썼다.
부친은 강세정(姜世靖), 모친은 권세억(權世檍)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 등을 지냈다.
1805년(순조 5)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3년에 수안군수로 있을 때 군적(軍糴)의 폐단을 논하고 새로운 화폐의 주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부사직을 거쳐 1817년에 사간이 된 뒤 승지에 이르렀다.
벽파(僻派)의 일원으로 1801년 윤행임(尹行恁)의 축출에 앞장섰으며, 1813년 정약용(丁若鏞)의 석방을 반대하였다. 또,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비난하였다.
시무에 밝아 여러 번 어사 물망에도 올랐다. 서예에 능하여 금석문을 많이 썼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簪纓譜
淸選考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簪纓譜
淸選考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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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