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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홍(尹濟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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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도(景道)
호(號)찬하(餐霞)
생년1764(영조 40)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예술‧체육 > 화가
윤석복(尹錫復)
조부윤득수(尹得壽)

[상세내용]

윤제홍(尹濟弘)
1764년(영조 40)∼미상.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도(景道), 호는 학산(鶴山) 또는 찬하(餐霞). 이재(李縡)의 문인 윤득수(尹得壽)의 손자이며, 윤석복(尹錫復)의 아들이다.

고향은 양주이고, 그 집안에 전하여오던 「부미첩(負米帖)」을 보면 몹시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집안에 청백리와 효자가 많았음을 자부하였다고 한다.

1792년(정조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1801년 정언이 되었다.

1806년 김구주(金龜柱)의 관작이 추탈될 때 그 일파라 하여 창원에 유배되었다.

1830년 풍천부사로 재임중 암행어사 홍희석(洪羲錫)의 탄핵으로 삭직당하였으나, 1840년 다시 대사간에 이르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유배를 당하면서도 대사간에 이른 것을 보면 교우관계도 넓었을 법한데, 그의 화명(畵名)을 알려주는 기록은 신위(申緯)가 “청풍수(淸風守) 윤제홍의 산수는 한때의 선(選)이다.”라고 한 것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작 중에는 높은 화격을 보여주는 작품이 전해지며 특히 지두화(指頭畵)에 능하여 여러 폭의 지두화첩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들어 있는 제기(題記) 중에는 정선(鄭歚)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화풍에 스스로 비교한 것들이 있고 때로는 이들을 방작(倣作)한 것도 보인다.

특히, 「고사도(高士圖)」(개인 소장)‧「옥순봉(玉筍峰)」(호암미술관 소장)‧「모루관폭도(茅樓觀瀑圖)」(개인 소장) 등에서는 이인상의 영향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화제에도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閔丙燾 소장)는 선결한 담채법(淡彩法)과 암봉(巖峰)의 독특한 표현이 후대의 이재관(李在寬)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등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조선 후기 문인화풍의 한 계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韓國의 美 12―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2)
朝鮮王朝實錄의 書畵史料(安輝濬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李麟祥 繪畵의 發生과 變遷(兪弘濬, 考古美術 161, 韓國美術史學會, 1983)

[집필자]

유홍준(兪弘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