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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염(金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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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청여(淸如)
생년1762(영조 38)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김재인(金載人)

[상세내용]

김염(金鐮)
1762년(영조 38)~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청여(淸如)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김상백(金相伯)이고, 조부는 김형(金炯)이며,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사직(行龍驤衛副司直) 김재인(金載人)이다. 외조부는 이형신(李衡臣)이고, 처부는 이영주(李英胄)이다.

1786년(정조 10) 식년시 생원 2등 25위로 합격하였고, 1802년(순조 2) 정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수찬(修撰)‧선교관(宣敎官)‧호군(護軍)‧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경기감사(京畿監司) 등을 역임하였다.

1806년(순조 6) 장령(掌令) 안정선(安廷善) 등과 함께 1801년(순조 1)에 올렸던 상소의 내용과 문구에 문제가 생겨서 대역죄로 참형(斬刑)에 처해진 권유(權裕)와 관련된 인물인 이익모(李翊摸)를 유배시킬 것을 임금에게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같은 해에 집의(執義) 이동면(李東冕) 등과 함께 권세가들에게 아첨하고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나쁜 짓을 일삼은 서매수(徐邁修)의 삭탈관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또 대사간(大司諫) 윤서동(尹序東) 등과 함께 임금의 총애를 믿고 방자한 언행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김달순(金達淳)의 죄를 묻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1821년(순조 21) 하례(賀禮) 때 선교관(宣敎官)을 맡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1823년(순조 23) 신주서사관(神主書寫官)을 맡아 책임을 다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다. 같은 해에 서손(庶孫)들에게도 관직에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유생들의 상소문이 올라왔을 때 서손들의 청요직 관직 등용을 반대하였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純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