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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보(朴宗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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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신(汝臣)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760(영조 36)
졸년1808(순조 8)
시대조선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준원(朴準源)
외조부원경유(元景游)

[상세내용]

박종보(朴宗輔)
1760년(영조 36)∼1808년(순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신(汝臣).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의 아들이며, 모친은 증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1787년(정조 11) 누이가 유빈(綏嬪)이 되자 음보(蔭補)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등용되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의빈부(儀賓府)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7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누이가 정조의 아들 즉, 순조를 낳자 임금의 명에 따라 궁중에서 보육의 책임을 맡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할 때, 왕의 몸을 보호하는 근척(近戚)이 측근에 있어야 한다고 하여 임금의 외숙으로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고, 임금이 천연두를 앓을 때 입직한 공로로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03년 형조참판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1806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도시제조(司䆃寺提調)가 되었다.

이때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음관(蔭官)이 단천(單薦)으로 호조판서가 된 것은 유례가 없다.”고 세 차례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비변사당상으로 경질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정조로부터 “비록 음관으로 벼슬에 올랐지만 풍도(風度)는 문신과 같으니 후일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여러 번 과거에 떨어졌으나 태연하였고 초년에 빈한하게 살았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올라 녹봉이 많아지자 즐겨 남을 도와주었으며,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雲石遺稿
潘南朴氏世譜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