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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연(李明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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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량(汝亮)
호(號)구포(瞿圃)
생년1758(영조 34)
졸년1803(순조 3)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의행(李義行)

[상세내용]

이명연(李明淵)
1758년(영조 34)∼1803년(순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량(汝亮), 호는 구포(瞿圃).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의 후손이며, 대사헌 완성군(完城君) 이의행(李義行)의 아들이다.

한양에서 자랐으며, 1790년(정조 14)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전강(殿講)의 수석이 되었고, 그해에 증광문과전시에 직부(直赴)하여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된 이래 홍문록‧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민생의 어려움을 이유로 금주를 주장하여 왕의 허락을 얻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였다.

1797년 사헌부집의로 있을 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시폐와 왕의 잘못을 숨김없이 극간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오자 대신을 비롯하여 사헌부사간원 양사에서 시국을 비방한 죄로 끊임없이 탄핵하였으나 정조가 홀로 그의 충성됨을 알아 끝까지 옹호하여 주었다.

그뒤 누차 불렸으나 조신들의 반대로 내직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흥부사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두문불출하고 다시는 세상일을 듣지 않았다.

성품이 준정(峻整)하여 절의를 숭상하였고,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음을 가장 미워하였다. 문장이 웅대하여 붓을 한번 들면 수천언(數千言)을 썼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國朝榜目
老洲集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