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具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D6CAC15FFFFB1757X0 |
자(字) | 공휴(公休) |
호(號) | 휴휴(休休) |
생년 | 1757(영조 33) |
졸년 | 1832(순조 3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능성(綾城)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구윤빈(具允斌) |
처 | 청송심씨(靑松沈氏) |
외조부 | 신긍구(申肯構) |
저서 | 「교주별곡(交州別曲)」 |
저서 | 『북새곡(北塞曲)』 |
저서 | 『휴휴집(休休集)』 |

[관련정보]
[상세내용]
구강(具康)
1757년(영조 33)∼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시인.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공휴(公休), 호는 휴휴(休休).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구윤빈(具允斌)의 아들이며, 모친은 부사과(副司果) 신긍구(申肯構)의 딸이고, 부인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179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98년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80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803년 전적(典籍), 이듬해 수안군수, 1806년 장령, 이듬해 대독관(對讀官)과 부사과를 거쳐 1808년 정언으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다시 전적으로 임명되었다가 1809년 다시 정언이 되었다.
1812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고, 1813년 가을에는 함경도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다음해 봄까지 관북일대 24읍 5,700리에 달하는 험준한 노정을 다니며 왕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때의 현지 체험은 장편 「북정(北征)」을 위시하여 60여 수의 한시를 짓게 하였고, 국문가사 「북새곡(北塞曲)」 등 많은 문필유산을 남게 하였다.
1814년 정언에서 사간으로 옮겼다.
1815년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1818년 부승지에 올랐으며, 1819년 잠시 외직을 맡아 회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820년 다시 내직으로 옮겨 부승지를 거쳐 공조참의를 지냈고, 1822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뒤 1824년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1828년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강유(剛柔)를 겸한 성품으로 관직수행에 철저하였음은 함경도어사 임무를 마치고 올린 서계(書啓)에 잘 나타난다.
그는 문학을 생활화하여 장편 「북정」과 한시문 외에도 가사작품을 통하여 삶의 다양한 실상을 펴냈다.
특히, 장편기행가사 「북새곡」은 함경도어사 임무를 수행하는 중 현지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사실적으로 써낸 작품으로, 가난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현지 백성들의 삶의 실상이 생생하게 부각된 작품이며, 회양부사직을 맡아 현지에서 보고 겪은 바를 가사로 지은 「교주별곡(交州別曲)」은 명승지 금강산으로 관광차 오는 상위계층들의 횡포가 현지 백성들에게 얼마나 가혹하였는가의 실상이 생생하게 부각되어 있다.
기타의 가사작품 「황계별곡」‧「희주가」‧「동호별곡」‧「제석탄」‧「금강곡」‧「셕가」‧「진회곡」‧「사미인곡」‧「격적가」‧「기슈가」 등도 시의식이나 소재‧시어‧기법면에서 각기 작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의 시가작품들은 근대의식에 바탕을 둔 점과, 생활체험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작품화한 점이 특성이다.
저서로는 가사집 『북새곡(北塞曲)』과 문집 『휴휴집(休休集)』이 있다.
179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98년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80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803년 전적(典籍), 이듬해 수안군수, 1806년 장령, 이듬해 대독관(對讀官)과 부사과를 거쳐 1808년 정언으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다시 전적으로 임명되었다가 1809년 다시 정언이 되었다.
1812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고, 1813년 가을에는 함경도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다음해 봄까지 관북일대 24읍 5,700리에 달하는 험준한 노정을 다니며 왕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때의 현지 체험은 장편 「북정(北征)」을 위시하여 60여 수의 한시를 짓게 하였고, 국문가사 「북새곡(北塞曲)」 등 많은 문필유산을 남게 하였다.
1814년 정언에서 사간으로 옮겼다.
1815년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1818년 부승지에 올랐으며, 1819년 잠시 외직을 맡아 회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820년 다시 내직으로 옮겨 부승지를 거쳐 공조참의를 지냈고, 1822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뒤 1824년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1828년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강유(剛柔)를 겸한 성품으로 관직수행에 철저하였음은 함경도어사 임무를 마치고 올린 서계(書啓)에 잘 나타난다.
그는 문학을 생활화하여 장편 「북정」과 한시문 외에도 가사작품을 통하여 삶의 다양한 실상을 펴냈다.
특히, 장편기행가사 「북새곡」은 함경도어사 임무를 수행하는 중 현지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사실적으로 써낸 작품으로, 가난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현지 백성들의 삶의 실상이 생생하게 부각된 작품이며, 회양부사직을 맡아 현지에서 보고 겪은 바를 가사로 지은 「교주별곡(交州別曲)」은 명승지 금강산으로 관광차 오는 상위계층들의 횡포가 현지 백성들에게 얼마나 가혹하였는가의 실상이 생생하게 부각되어 있다.
기타의 가사작품 「황계별곡」‧「희주가」‧「동호별곡」‧「제석탄」‧「금강곡」‧「셕가」‧「진회곡」‧「사미인곡」‧「격적가」‧「기슈가」 등도 시의식이나 소재‧시어‧기법면에서 각기 작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의 시가작품들은 근대의식에 바탕을 둔 점과, 생활체험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작품화한 점이 특성이다.
저서로는 가사집 『북새곡(北塞曲)』과 문집 『휴휴집(休休集)』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承政院日記
北塞曲
休休集
綾城具氏文獻錄(綾城具氏大宗會, 1989)
韓國古典文學新資料硏究(朴堯順, 韓南大學校出版部, 1992)
承政院日記
北塞曲
休休集
綾城具氏文獻錄(綾城具氏大宗會, 1989)
韓國古典文學新資料硏究(朴堯順, 韓南大學校出版部, 1992)
[집필자]
박요순(朴堯順)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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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