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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희(金思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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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여(逸汝)
생년1753(영조 29)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김기대(金器大)
생부김주신(金柱臣)

[상세내용]

김사희(金思羲)
1753년(영조 29)~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일여(逸汝)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부는 증참의(贈參議) 김개신(金介臣)이고, 조부는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사옹원사도시첨정(司饔院司䆃寺僉正)‧가평군수(加平郡守) 등을 역임한 김구연(金九衍)이다. 부친은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예조판서(禮曹判書)‧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역임한 김기대(金器大)이다. 모친은 참판(參判) 이우(李堣)의 딸이다. 생부는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아버지인 국구(國舅)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다. 형은 김사의(金思義)이다.

1773년(영조 49) 증광시에 진사 3등 59위로 입격하였다.

1783년(정조 7)에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릴 때 거독안집사(擧讀案執事)로 참여하여 승급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토산현감(兎山縣監)에 제수되었다. 1787년(정조 11) 참사관(參査官)으로서 암행어사(暗行御史) 이곤수(李崑秀)와 함께 평산부에서 일어난 살해사건을 조사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부담기(負擔機)를 탔다는 이유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시수(李時秀)가 김사희(金思羲)의 처벌을 요청하였다. 1797년(정조 21)에 화성행궁에서 돌아오는 정조를 알현하였고, 1800년(정조 24)에는 수원판관(水原判官)으로서 팔달문(八達門) 밖의 토지를 잘 개간하였다고 상을 받았다. 1805년(순조 5)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나주목사(羅州牧使)‧재령군수(載寧郡守)에 제수되었다. 나주목사와 재령군수로 재직할 당시 지역을 잘 다스려 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