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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연(金會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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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문통(文通)
호(號)효운루(曉雲樓)
생년1750(영조 26)
졸년1817(순조 17)
시대조선후기
본관청풍(淸風)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종정(金鍾正)
저서『효운루집』
저서『청사유편(靑史類篇)』

[상세내용]

김회연(金會淵)
1750년(영조 26)∼1817년(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문통(文通), 호는 효운루(曉雲樓).

부친은 이조판서 김종정(金鍾正)이다.

1776년(영조 52) 생원시에 합격하고, 1800년(정조 24)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로 임명되었다.

1801년(순조 1) 홍문관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교리 이상겸(李象謙)의 유배를 청하는 등 경연에서 과격한 발언으로 김대비(金大妃: 貞純王后)의 격노를 사서 해남현(海南縣)에 유배되었으나, 그해에 다시 김대비에 의하여 특방되었다.

그뒤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된 뒤, 종부시부정(宗簿寺副正)응교(應敎) 등을 거쳐 승지가 되었고, 안동부사로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1805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고, 1808년에 예조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이조참의를 거쳐 1810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을 때는 신수곡(信需穀)을 비치하였다.

이는 통신사일본에 갈 때 많은 경비가 소요되어 부담이 되자 영문(營門)의 별비전(別備錢)의 이식을 열읍(列邑)에 취한 것을 이자를 붙여 징봉(徵捧)하게 하고, 전(錢) 1만민(緡)으로 곡(穀) 1만석을 만들었고, 제민창미(濟民倉米) 2천석으로 조(租) 6천석을 만들었으며, 또한 스스로 4천석을 비축하고, 군읍(郡邑)의 대소와 공비(供費)의 많고 적음을 살펴 분표(分俵)하여 모(耗)를 취하여 이듬해 가식(加殖)한 것으로 통신사의 비용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며, 또한 백성들에 대한 잡부금을 엄금함으로써 신망을 얻었다.

1813년 이조참의를 거쳐, 1815년 예조참판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고, 이 사이 여러 번 승지로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효운루집』『청사유편(靑史類篇)』이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梅山集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