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부(鄭澤孚)
[상세내용]
정택부(鄭澤孚)
1730년(영조 6)~미상.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증조부는 정유신(鄭維新)이고, 조부는 정사인(鄭思仁)이다. 부친 정원석(鄭元錫)과 모친 이함령(李咸齡)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8년(영조 44) 식년시에서 병과 36위로 급제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옥구현감(沃溝縣監)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역적 이찬(李禶)의 종 명복(命卜)에게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해주는 등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교리(校理) 이겸빈(李謙彬)으로부터 이러한 행위가 역적을 돕는 패악한 행위가 된다는 지적을 당하였다. 그 결과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받았으며,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를 당하였다. 1782년(정조 6)에는 사은을 입어, 유배지에서 풀려나왔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직첩(職牒)을 환급받았다. 1788년(정조 12)에는 대신(大臣)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임금의 특명으로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장령(掌令)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사헌부(司憲府) 관리들에 대해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으로부터 진의를 모호하게 하여 무고한 상소를 하였다는 질책을 받았다. 그 결과 관직에서 삭직되었다.
증조부는 정유신(鄭維新)이고, 조부는 정사인(鄭思仁)이다. 부친 정원석(鄭元錫)과 모친 이함령(李咸齡)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8년(영조 44) 식년시에서 병과 36위로 급제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옥구현감(沃溝縣監)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역적 이찬(李禶)의 종 명복(命卜)에게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해주는 등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교리(校理) 이겸빈(李謙彬)으로부터 이러한 행위가 역적을 돕는 패악한 행위가 된다는 지적을 당하였다. 그 결과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받았으며,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를 당하였다. 1782년(정조 6)에는 사은을 입어, 유배지에서 풀려나왔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직첩(職牒)을 환급받았다. 1788년(정조 12)에는 대신(大臣)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임금의 특명으로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장령(掌令)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사헌부(司憲府) 관리들에 대해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으로부터 진의를 모호하게 하여 무고한 상소를 하였다는 질책을 받았다. 그 결과 관직에서 삭직되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正祖實錄
正祖實錄
[집필자]
정병섭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