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벽(崔光璧)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AD11BCBDB1728X0 |
자(字) | 공헌(公獻) |
호(號) | 이우정(二友亭) |
생년 | 1728(영조 4) |
졸년 | 1791(정조 15)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수인(崔壽仁) |
출신지 | 선산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광벽(崔光璧)
1728년(영조 4)∼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헌(公獻), 호는 이우정(二友亭). 선산 출신. 최수인(崔壽仁)의 아들이다.
1754년(영조 30)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가주서‧세자시강원설서를 지냈다.
1762년 자신이 직접 학문을 가르친 왕세자(王世子: 思悼世子, 뒤에 莊祖로 추존)가 궤 속에 갇혀 굶어 죽는 참극을 당하자 깊은 충격을 받고 무언의 항변으로 인륜을 개탄하며 관직에서 떠났다.
1766년 다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와 1769년 장령으로 승진한 뒤 1782년(정조 6) 돈녕부도정에 발탁되었으니 삼사소속 관원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뒤 병조참판을 거쳐 사직한 뒤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다.
1754년(영조 30)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가주서‧세자시강원설서를 지냈다.
1762년 자신이 직접 학문을 가르친 왕세자(王世子: 思悼世子, 뒤에 莊祖로 추존)가 궤 속에 갇혀 굶어 죽는 참극을 당하자 깊은 충격을 받고 무언의 항변으로 인륜을 개탄하며 관직에서 떠났다.
1766년 다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와 1769년 장령으로 승진한 뒤 1782년(정조 6) 돈녕부도정에 발탁되었으니 삼사소속 관원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뒤 병조참판을 거쳐 사직한 뒤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海左集
正祖實錄
國朝榜目
海左集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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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